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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3구 vs 비강남 매매가 격차 역대 최저
    예전만 못한 강남 부동산,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까?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강남에 집을 마련해 살기 위해서는 훨씬 큰돈을 들여야 했던 과거와 달리 강남과 비강남의 매매가 격차가 역대 최저치로 줄었다. 이에 대해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써브의 리포트를 들어본다.자료제공 부동산써브(www.serve.co.kr) 강남3구 입성, 4억 7,095만 원으로 감소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강남3구와 비강남22구 매매가 차이가 역대 최저치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써브가 매년 6월 3주차 시세를 기준으로 지역별 평균 매매가를 분석한 결과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평균 매매가는 8억 9,952만 원, 비강남22구는 4억 2,857만 원으로 그 격차가 4억 7,095만 원인 것으로 조사됐다.이는 2006년 조사 이래 최저치로 강남3구와 비강남22구 평균 매매가 차이가 가장 컸던 2007년(6억 2,297만 원)보다 1억 5,202만 원이 줄어든 수치다. 매매가 차이 컸던 2007년 보다 1억 5천여 만 원 줄어강남3구가 버블세븐으로 지정됐던 2006년 당시 강남3구와 비강남22구 평균 매매가 차이는 5억 9,889만 원이었다. 2007년에는 그 차이가 더 벌어져 6억 2,297만 원으로 최대치를 기록하며 비강남에서 강남으로의 이동이 가장 어려웠다.그러나 2008년에는 대출규제 내용을 담은 11.15대책(2007년) 등 급격하게 오른 매매가 상승 억제를 위한 부동산 정책 등으로 강남과 비강남간 평균 매매가 차이가 5억 7,925만 원으로 줄었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에는 고가 아파트가 많은 강남이 매수심리 위축으로 매매가 하락이 커지며 5억 2,125만 원으로 평균 매매가 차이가 더 감소했다.2010년 이후에는 강남과 비강남간 평균 매매가 차이가 5억 원을 웃도는 수준에 머물렀으나 올해 들어 4억 7,095만 원으로 감소하며 2006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대형/고가/재건축 아파트 하락폭 컸던 탓이러한 강남3구와 비강남간 격차 차이 감소는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데다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재건축 사업에 대한 공공성 강화 요구로 재건축 아파트 매매가 약세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강남3구 매매가 하락폭이 비강남에 비해 더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강남3구는 올해 들어 새 정부 기대감과 4.1대책 등으로 반짝 상승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최근 매매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면서 현재까지 줄곧 약세를 보이고 있다. 투자수요와 부동산 정책 등 시장변화에 민감한 강남3구의 특성상 대·내외 실물경기와 정부의 주택 정책 요인들이 호전되지 않는 한 매매가 하락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강남3구의 경우 중대형/고가 아파트가 많아 다른 지역에 비해 하락폭이 크기 때문에 강남과 비강남간 집값 차이는 더욱 좁혀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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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26
  • 상가분양 사기를 알아내는 몇가지 노하우
    허황된 수익률 보장 상가는 경계해야“선임대”, “수익률 보장”이란 단어를 인터넷에 입력하면 상가 업체들의 홍보성 기사가 끝도 없이 나온다.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실제 현장에서도 선임대방식의 상가 분양이 유행하고 있다. 상가 공실을 미리 걱정하는 투자자들의 심리를 잘 이용한 신 마케팅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고객들과 상담하다 보면 상담 피해사례가 계속 접수되어 독자들의 환기차원에서 다시 한 번 기술하고자 한다. 글 박상언 유엔알 컨설팅 대표 박상언 대표 프로필유엔알 컨설팅 대표강원대,건대.연세대 강사저서: 10년후에도 살아남을 부동산에 투자하라 등 다수한국 HRD 선정 명강사 대형쇼핑몰의 공실 상가들 박근혜 정부 취임이후에도 상가 분양에 고전하는 업체들 위주로 미래 공실 발생에 대한 손실을 줄일 수 있도록 신도시를 중심으로 선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늘고 있다. 투자자들 역시 임대수익률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정적인 투자처라는 생각에 ‘선임대 상가’를 선호하고 실제 이런 상가에 대한 투자문의도 증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선임대 상가라고 해서 전부 믿으면 곤란하다. 선임대 상가에 대한 투자자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점을 이용해 분양 현장에서 3~5년간 선임대를 약속하고 분양하고 있는 업체가 수두룩하다. 일종의 사기 영업이다. 선임대완료 분양사기작전을 알아내는 노하우 다섯 가지 첫째, 선임대 계약과 관련한 임대인의 계약주체가 분양계약서의 대상주체인 시행사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계약의 주체가 분양영업사원이라면 ‘가짜 선임대’ 작전일 가능성이 크다. 본래 임대차 계약은 소유권이 확보된 임대인과 계약을 체결해야 원칙이지만 분양상가의 경우 건물등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유권에 대한 등기 표현이 모호하다하더라도 정상적인 임차인이라면 시행사와 체결한 계약서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해당 선임대 계약과 관련한 계약금을 영업담당자가 보관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행사가 보관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만일 영업담당자가 보관하고 있다면 이 역시 ‘거짓계약서’ 작성에 의한 작전일 가능성이 많다. 특히 계약금이 시행사의 통장으로 입금된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정상적인 선임대 계약이었다면 계약금 송금은 의당 계약의 주체인 시행사 통장으로 입금되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세 번째, 선임대 임차인과 대면해 임차의지를 확인해라. 이때 해당임차인에게 과거 사업경력 여부를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임차인의 경우, 신규 초보창업자일 수도 있으나 과거 창업경력이 있다면 얼마간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임차인을 만나서 사업을 처음 시작한다고 하면 일단 의심하는 게 안전하다. 네 번째, 병원과 같은 특수 업종의 경우에는 해당 임차인의 면허증을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자격증을 구비해야 영업이 가능한 업종은 해당임차인의 자격여부확인을 통해두면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되는 셈이다. 다섯째, 보증금 계약금의 비중이 지나치게 작다면 이런 선임대 계약을 깊게 신뢰하지 마라. 보증금 계약금의 비중이 상당한 수준이라면 영업담당자가 속칭 “거짓 선임대”를 통해 취할 이득이 없기 때문에 피해예방이 될 수 있다. 지난 2003년 굿모닝시티 사건이후 사기분양의 폐단을 사전에 막고자 분양절차를 강화한 상가후분양제가 2005년 4월23일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투자자들이 상가를 고를 때 우선 이름을 자주 바꾸는 상가를 주의해야한다. 현장조건의 변화는 거의 없으면서 사업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이름만 바꿔 개명하는 상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수익률 보장상가도 주의해야, 공정위가 공개한 부당·광고 유형들의 대부분이 주로 상가 분양 광고에 집중상가 등 분양과 임대 과정에서 허위·과장 광고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토지나 상가 등의 주요 부당 표시와 광고 행위를 심사하기 위한 심사지침을 시행하면서 주요 부당 표시·광고 유형을 공개했다. 공정위가 공개한 부당·광고 유형을 보면 업체들은 소비자가 오인할 가능할 문구를 사용하거나 객관적·구체적 근거 없이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다. 또 제공하는 연관 서비스 등을 부풀려 광고하거나 분양 현황과 다른 문구로 소비자를 유인했다. 우선 실제 분양실적이 저조한데도 “95% 분양완료!”, “빨리 신청해야 가능합니다”, “○차분 ○개 점포 100% 분양”, “평균 경쟁률 15대 1”, “최고경쟁률 18대 1”, “전국 지하상가 최고의 경쟁률”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은행지점이 입점계약서에 기명날인하지 않고 구두로 약속만 한 상태에서 “○○은행지점 입점확정” 등의 사실과 다른 표현을 쓰는 사례도 있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 및 주택밀집지역 유일한 상가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인근에 연금매장 등 상가가 있는 경우도 많다. 그밖에 “지가가 전국 최고수준으로 급상승할 전망”, “절대 우위의 재산가치 입증”, “입점과 동시에 엄청난 투자증식 효과가 확실히 보장되는 상가” 등의 표현과 “2,000만원 투자 시 월 100만 원 이상 임대수익 보장”, “○○원 투자 시 2년 내 200% 수익 보장” 등 문구도 부당광고 유형이다. 주변 상가 권리금(옛 10평 기준)이 2,000만원인데 “분양(입점) 후 권리금이 2,000만~4,000만원 확실”이라고 광고하거나 융자 조건을 표기하지 않고 단순히 “파격적인 융자혜택” 등으로 표시하는 경우, 융자 알선만 해주면서도 “은행 융자 실시”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부당 광고다. 실제 수익률을 보장해준다고 광고하는 상가 중에서 실제 분양 후 약속된 금액을 입금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심지어 필자는 한 번도 약속을 지키는 업체를 본적이 없다. 주로 테마상가, 쇼핑몰 등에서 확정수익 지급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대로 상권이 자리 잡지 못할 경우가 태반이라 약속된 내용이 입금되지 못하게 된다. 수익률 보장을 내세우면서 시행사나 분양대행사 측에서 임대료를 보조지급해서 수익률을 맞춰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주의해야한다. 분양가가 애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투자자에게 수익률을 못 맞춰주기 때문에 일정기간 임대료를 보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임대료 보조 기간(실제로 해당 기간 동안 약속대로 임대료 보조하는 곳은 거의 없음)이 끝나게 되면 세 들어 있는 임차인이 임대료 수준을 못 맞춰주게 되어 투자자들이 경제적인 파탄에 이르게 되어 “상가푸어”가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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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26
  •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 ⑥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 ⑥로큰롤(rock’n’roll)의 탄생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Elvis Presley의 첫 히트곡은 Willie Mae “Big Mama” Thornton이 불렀던 블루스 곡로큰롤은 한 마디로 점프블루스의 부기우기 반주가 붙은 빠른 댄스용 블루스이다. 로큰롤의 선율도 1940년대의 점프 블루스의 것과 유사하며, 다수의 로큰롤 음악이 블루스의 커버 버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로큰롤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Bill Haley & His Comets의 Shake, Rattle and Roll (1954)는 점프블루스 주자였던 Big Joe Turner (1911-1985)의 곡이었으며, Rock Around the Clock, 1955)는 12마디 패턴의 블루스 형식으로 되어 있다. Elvis Presley의 첫 히트곡인 1956년의 Hound Dog (100만장 이상의 음반이 판매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함)도 원래는 여성 블루스 싱어이며 기타리스트였던 Willie Mae “Big Mama” Thornton (1926-1984)이 불렀던 블루스 곡이었다. 로큰롤의 가사는 흑인 속어와 대담한 성적 표현을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 부분이 훗날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록큰롤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변화, 자유, 새로운 시대와 자유로운 의지의 표상 ‘로큰롤’로큰롤이 1950년대 후반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유행한데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대중매체의 확산(자동차에도 라디오가 부착되기 시작)과 젊은이들이 의식의 변화가 음악의 성향과 맞아 떨어졌다는 견해와, 록과 그 시작인 로큰롤은 자유를 향한 시대의 반영이라는 설이다. 또한 성적 억압과 전통적인 사고로부터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와 자유로운 의지의 표상이기도 했다. Elvis Presley -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결합인 로큰롤의 상징1950년대 후반은 사회, 문화적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며 로큰롤이 성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미국에서는 1954년에 처음으로 공립학교에서 흑백의 구별을 없애도록 지시가 내려지는 등 인종차별정책의 완화 과정에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50년대 초부터 R&B를 전문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시작되었다(Szatmary 1997).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폭넓게 대중화된 TV에 흑인들을 출현시켜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까지는 아직 못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음반사업자 가운데 일부는 흑인적인 풍부한 감성의 음악을 백인이 연주할 수만 있다면 TV의 출현은 물론이고 그 효과를 통해 특히 경제 성장으로 구매력이 커진 백인을 상대로 돈을 벌수 있겠다는 경제논리가 당시 로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하던 Bill Haley와 Elvis Presley 등을 발굴하여 스타로 등극시켰고, 음반 산업도 엄청난 규모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특히 Elvis Presley는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결합인 로큰롤의 상징이다. 백인인 그는 블루스의 근원지인 미시시피 주에서 태어나 역시 블루스의 또 다른 중심지이면서 컨트리 음악도 성행했던 멤피스에서 활동을 했고, 그가 부른 여러 로큰롤들의 작곡가(Otis Blackwell 1931-2002)는 흑인이었다(Giddens 1995) 로큰롤은 Elvis Presley등의 백인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지만, 그것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Chuck Berry, Fats Domino(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피아노 주자) 등 일부 흑인 주자들도 차차 명성을 날리며 스타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흑인음악에 대한 원천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고 백인사회에서 그 가사의 저속함과  10대들의 난폭하고 반항적인 행동이 그런 음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기성세대들의 거듭되는 비난의 여론으로 로큰롤의 열기는 진정된다. Chuck Leavell - Back To The Woods This album came about in large part because of a suggestion made by Leavell’s son-in-law, Steve Bransford, and we should be darn glad that he did because this disc is fun to listen to.  The CD pays homage and a thank you to early piano blues pioneers like Leroy Carr, Memphis Slim, Barrelhouse Buck McFarland, Otis Spann, Little Brother Montgomery, Charlie Spand, Charles Calhoun, Ray Charles, Skip James, Leola Manning, and Jesse James.  To paraphrase Leavell’s intentions shared in the album’s notes, this is his interpretation and treatment of these great blues tunes and not a replication of them (Leroy Carr에서부터 Ray Charles에 이르기까지 블루스 피아노 선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든 앨범으로 그의 사위에 제안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내용).* Chuck Leavell Biography   The Rolling Stones. Eric Clapton, George Harrison등의 앨범에 참여한 미국태생의 The Allman Brothers Band 출신의 피아노, 오르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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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8
  •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⑤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⑤Jump Blues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점프 블루스, ‘Rock & Roll’을 탄생시키다점프 블루스란 도약을 나타내는 ‘점프’라는 타이틀을 가진 블루스인데, 말 그대로 활기찬 리듬이 두드러진 블루스이다. 기존의 블루스에 부기우기와 셔플리듬의 약동적이고 리드미컬한 요소가 첨가되어 활달하고 경쾌하다. 즉 스윙재즈, 부기우기, 블루스가 믹스되어 신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흡사 스윙재즈처럼 들리기도 한다. 당시 재즈의 스윙 영향을 받아 엔터테이너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고, 익살맞은 내용과 음악 분위기를 연출하는 댄스용 음악이기도 하다. 연주 시에는 색소폰과 같은 관악기와 혼 섹션이 첨가되어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블루스가 재즈에서 파생됐다고 오해를 받게 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점프 블루스는 40년대 중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초창기 R&B의 이전 단계라 할 수 있다. R&B로 이름이 바뀐 점프 블루스는 이후 인종에 관계없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게 되며, 백인들의 음악적 영감을 상당히 자극시키게 된다. 이 R&B는 많은 백인 뮤지션들이 커버하게 되고, 급기야 ‘Rock & Roll’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초창기의 R&B는 작금의 R&B와는 음악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초창기 백인 로큰 롤러들의 출신 지역이 블루스가 유행하던 내쉬빌 이남의 남부 지역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Rock & Roll’의 최초 주자는 재즈 뮤지션 Louis Jordan부기우기, 점프블루스가 ‘Rock & Roll’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과연 최초의 ‘Rock & Roll’은 누가 만들었을까? Louis Jordan(1906-1975), 빅밴드에서 섹소폰 주자로 활동하던 재즈 뮤지션이었다.왜, 재즈뮤지션이 로큰롤의 최초 주자였을까? 그의 태생과 성장배경을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루이스는 아칸사스 브링클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남쪽에 재즈의 메카 뉴올리언스, 동쪽으로 델타블루스의 성지라 불리는 미시시피, 동북쪽으로는 컨트리 음악의 중심지 내슈빌, 서쪽은 텍사스, 더군다나 그의 부친은 음악가였다. 집안과 주변의 환경이 그에게 음악적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 것이다. 30년대 초 뉴욕으로 진출, 36년 그 유명한 Ella Fitzgerald가 메인싱어로 있던 Savoy Ballroom 오케스트라에 가입한다. 그는 밴드에서 연주뿐 아니라 노래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 드디어 30년대 후반  자신의 밴드 Louis Jordan and Tympany Five를 결성하더니 40년대 초반 ‘You’re My Meat.’라는 곡을 발표하며 히트를 한다. 이어 1945년 발표한 ‘Caldonia’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Caldonia’(B.B. King의 원곡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라는 곡이 최초의 Rock & Roll이다. 원래 재즈뮤지션이었으나 최초의 크로스오버 아티스트이며 로큰롤의 모든 요소를 만들었다.가장 큰 그의 공로는 당대 백인들에게 Race Music이라고 불리며 천대받던 블루스를  40년대 후반부터 리듬앤블루스(당대의 리듬앤블루스와 다름) 라고 불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50년대 중반까지 블루스를 리듬앤블루스라 불렀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블루스라는 음악에 인종차별적 요소는 거의 없어진다.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해외 조직위원이 추천하는 블루스 명반 성명  Ken Koll       국적  미국       나이  58 직업  플로리다 항만 총감독, 블루스음반 수집가E-Mail  kkoll20@yahoo.com David Landon - I Like It Too Much (2012) Mr. Landon is once again joined in the studio by his blues lover’s dream band featuring Steve Evans on bass (Ray Manzarek, Roy Rodgers), Randy Hayes on drums (Chris Cain, Coco Montoya) and Tony Stead on organ (Sly Stone, Tommy Castro). Special guests include Melvin Seals (Jerry Garcia Band), Steve Willis (Elvin Bishop) and Alvon Johnson, as well as a 4-piece horn section made up of the bay area’s best players. Jack Derwin - Covered All In Blue (2013) Australian contemporary musician, delivers a blend of his own blues/jazz/roots and acoustic compositions, plus standards with originality.     Kevin Selfe - Long Walk Home (2013)Kevin Selfe is a man who has dedicated his life to the blues. For more than a decade, he has been sharing that love and dedication with audiences from coast to coast, building a loyal following wherever his energetic mix of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blues is he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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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 아름다운 떠남
    아름다운 떠남 글 김 다 나 [동요작사가 / 글 짓는 이] 이른 아침입니다.남편보다 서둘러 일어나 머리를 감고 외출 준비를 합니다.“어디 가?”뒤늦게 깬 남편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묻습니다.“응, 근데 나 오늘 어디 가냐고 묻지 마.”“알았어.”아니 뭐 이래? 아니 어떻게 이런 시큰둥한 대답이 냉큼 날아오나?“당신, 오늘 어디 가는지 나한테 절대 말하지 마.”얼씨구, 한 술 더 뜹니다.이럴 때 쓰는 말이 ‘헐!’ 이라는 것을 그때야 제대로 알았습니다.어제 저녁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부부싸움을 한 것도, 무엇 때문에 토라지지도, 삐치지도 않았는데, 오늘 아침 단박에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아니 이 사람이, 평소에 나한테 쌓인 게 많았나?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더니, 그런가? 왜 안 하던 시늉을 하지?그 수많은 의구심을 꿋꿋하게 참아가며 아침상을 차립니다.달그락 쩝쩝 후루룩 냠냠 딸깍고개도 안 들고 밥을 먹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기어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나를 계속 보고 있던 모양샙니다. 게다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이지요.“당신 왜 그래?”“뭐~얼~~~?”  아주 얄미워 죽겠습니다. 오늘도 내가 또 당했습니다. “사람이 말이야, 정말 왜 그래?”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한 마디 합니다.“당신, 아주 오랜만에 혼자 어딜 가고 싶어 하는 눈치라, 그래서 그러라고.”“그래도 그렇지, 마누라 어디 가는 지 묻지도 않고, 한술 더 떠 어디 가는지 말도 하지 말라는 남편이 어디 있어?”“당신이 어디 가는지 묻지 말라며?”KO 패!!! 아무튼 그렇게 집을 나섰습니다. 무작정 버스터미널로 달려가 내가 꿈에도 그리는 강원도 아무 곳으로나 나를 데려다 줄 버스를 찾아보니, 3분 뒤에 떠나는 속초 행 버스가 있네요. 얼씨구 좋다!!! 표를 끊고 부리나케 올라탑니다. 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윽 미끄러져 나갑니다. 설렘에 맘은 콩닥콩닥, 입 꼬리는 얼추 귀까지 닿을 요량입니다. 속초에 내려 어디로 갈 것인지,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생각해도 충분하니까요. 하긴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또 어떤가요, 그냥 바닷가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만 와도 충분한 걸요. 평일 오전이라 버스는 막힘없이 서울춘천고속도로를 내달리더니, 인제에 접어듭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그래도 양구보단 나으리.’ 예, 바로 그 인제입니다. 작년까지 양구에서 군 복무했던 아들이 알려준 말입니다. 양구로 들어가는 신남이 보입니다. 눈에 많이 익은 길이네요. 그렇게 미시령을 넘어 속초에 닿을 때까지 무엇을 할 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길만 보고 오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니까요. 거의 속초에 도착할 무렵,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강릉엘 가자. 커피 거리가 있다는데 거길 아직 한 번도 못 가봤잖아.’ 아, 이건 뭐 하늘이 도와준 겁니다. 내리자마자 바로 5분 뒤에 떠나는 강릉행 시외버스가 떡! 하니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강릉입니다. 버스 터미널이 옮겨졌더군요. 예전에 왔던 그곳이 아니었어요. 택시에 오릅니다. 정말 친절하신 초로의 기사께서 말 상대를 해 주시며 저를 바닷가 커피 거리에 내려 줍니다. ‘강릉 항’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우뚝 서 있습니다. 기억엔 여기가 ‘안목 항’이지 싶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하며 바닷가에 앉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닷가에 앉아 바다만 바라봅니다. 살짝살짝, 갈매기도 보고, 모래도 만져 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그런 이름의 자유, 이리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근슬쩍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 속에서 난리가 난 거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1인분을 파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와서 햄버거나 먹을 순 없잖아요. 회가 먹고 싶은데, 혼자 먹을 만큼의 적은 양을 파는 곳이 없습디다. 별 수 있나요, 물회 한 그릇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는 수밖에……. 그 밥집에 들어가서야 ‘안목 항’이 ‘강릉 항’으로 바뀐 걸 알았습니다. 뭔가 아쉬운 맘입니다. 물회 한 그릇 후루룩 말아 먹고, 바다와 해송의 기운이 잘 버무려진 길을 그냥 걸었습니다. 예, 그냥 한참을 걸었습니다. 십대 후반에 처음 와 본 곳을, 이십대에 몇 번 와 본 곳을, 이제 오십대가 되어 걸었습니다. 저 끝에 열아홉의 내가, 스물일곱의 내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예순의 내가 웃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여행은 이래야 한다는 혼자만의 지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서둘러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참 아름다운 떠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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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 알아두면 따뜻한 금융 지식
    알아두면 따뜻한 금융 지식왜 이리 주식 시장이 안 오를까 ? 국내 주식시장이 좀처럼 비상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을 분석해보고 전망을 예측해본다. 글 김형식 부장(신한금융투자 일산지점 031-905-8475)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일 주식시장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밤새도록 뉴욕시장을 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곤 아침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뉴욕 시장의 움직임이 별로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작년부터 우리 시장이 뉴욕시장과는 동떨어진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기간도 너무나 장기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얘기하는 뉴욕시장과의 디커플링(Decoupling)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근 미국 시장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시장은 3년째 그냥 그 자리를 맴돌고 있으니 상대적 빈곤감이 더해지고 있는 상태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언제쯤이나 우리 시장이 다시 한번 비상할 수 있을까 한번 가늠해 보자. 구조적 원인 - 인구 구조 악화와 제조업 경쟁력 우려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구조적인 첫 번째 문제는 미국은 아시아, 히스패닉 인구가 유입되며 매년 인구 증가율이 0.7~0.8%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인구 증가율은 추세적으로 둔화되고 있고 향후 2024년에는 마이너스로 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즉, 생산 가능한 인구가 점차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과 미국의 경제정책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경제는 기업(=투자) 중심에서 가계(=소비)를 위한 성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정책도 역시 전환되고 있다. 금융위기 전에는 부채 팽창에 의존해서 소비가 성장을 주도하였지만 과도한 부채의 대가로 금융위기라는 엄청난 후유증을 겪고 난 후 오바마 정부는 투자 팽창을 통한 제조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게 2000년대 이후 중국이 자국 산업에 대한 과잉투자 또는 자립화를 하면서 한국이 대중국 수혜가 사라지고 있다. 더구나 미국의 제조업 팽창은 한국 제조업에 또 다른 위기를 가져 올 수 있다. 이렇게 중국이 투자에서 소비를 육성하고 미국은 1990년대 같이 다시 제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한국경제는 모두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들 -> 환율과 수급 문제지난해 하반기 미 연준의 잇따른 양적 완화 정책 시행 등으로 인해 우리 원화는 가파른 절상 흐름을 보였다. 거기에다 일본 은행의 공격적인 통화 완화 정책이 더해지면서 우리 증시는 황폐화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엔화 약세 기조는 금융위기 이후 한국 기업이 일본과의 경쟁에서 환율을 통해 누려 왔던 수혜까지 토해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낳게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장에서 가장 크게 짓누르고 있는 수급 문제가 있다. 즉, 뱅가드의 추종 지수 변경과 FTSE 포트폴리오 조정 등이 더해져 수급이 상당히 꼬여져 지속되어 왔다. 과연 반등 할 수 있을까 ?다행히 하반기에는 중국 경기가 상저하고의 경기 흐름을 예상되며 하반기부터는 경기 모멘텀이 좀 더 개선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장을 압박했던 뱅가드 물량도 6월말 정도에는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이 수급 물량은 그 시점에 가봐야 알겠지만 이미 많은 물량을 덜어낸 것으로 나타나지고 있다.전반적으로 요약하면 단기적으로 한국 금융시장과 미국 금융시장 간의 디커플링 현상은 한 1~2개월 정도면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중국 경제 회복세 재개는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는 미국의 소비 지표가 어떻게 되가는지 좀 더 유심히 봐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이제 다시 우리 시장도 세계 증시 흐름과 커플링(coupling)되어 함께 호흡하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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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 주제로 읽는 책 읽기
    주제로 읽는 책 읽기 창조적인 쉼 얼핏 생각해보면 ‘쉼’이라는 주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다. 전통적인 시대에 쉼 혹은 여가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일과 노동이 주된 관심이고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쉼이란 드물게 누릴 수 있는 행운이고, 때로는 사치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다 찾아온 쉼이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영부영 흘려버리곤 했다. 게다가 쉼은 그냥 쉬면 되는 거지 쉬는 것까지 뭘 굳이 궁리해야하는지, 생뚱맞기까지 한다. 그만큼 현대 사회가 변하였고, 현대인들에게 쉼이 삶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사회학 등에서 이미 주목하여 많은 논의를 이루고 있다. ‘여가학(餘暇學)’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학문 분야가 조성되고 있기도 하다. 사회변동과 주5일근무제 등으로 인한 여가 시간의 증가, 여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 노동 대신 여가에 대한 관심 증대 등이 요즘의 상황이다. 이제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상황이다. 『동양사상과 탈현대의 여가』, 홍승표 外, 계명대출판부, 2006년 이 책에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여가 사상과 여가 생활에서 미래의 창조적인 여가 보내기를 위한 새로운 해답을 모색한다. 유교와 도교, 불교에서는 쉼과 여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들 내용이 현대인의 여가 생활에 어떤 영감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에 관한 일곱 편의 글이 실려 있다.이 책에서 우선 시선을 끄는 내용은 동양사상에서는 여가와 일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여가와 일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설정한다. 여가와 일을 구분하고 각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일은 부담스럽고 힘든 것이기만 하고, 이렇게 일에서 소진된 것을 여가에서 대신 충족 받으려 한다. 그러나 유교에 있어서 일과 쉼은 모두가 배움의 장이었다. 유학자들은 배움을 통해 두 개의 분리된 장을 통합하였고,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 갔다. 여가는 자기 성찰을 위한 또 하나의 장이며 진정한 여가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이 책의 제3장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여가 생활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일과 여가를 구분하지 않는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저자는 퇴계를 비롯한 선인들의 여가 생활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강학(講學), 글쓰기, 시 읊기, 한가함을 사랑함, 고요함을 기름, 거문고 뜯기, 투호놀이, 꽃구경, 고기 낚시, 술 마시기, 달구경, 서늘한 바람 쏘이기, 나물 밭 가꾸기 등이다.중요한 것은 이들 여가 생활, 즉 한거(閑居)를 통해 심기를 편안히 가지고 한가롭고 유쾌한 마음을 가져 마음공부를 이룰 것을 당부하는 점이다. 결국 한거는 마음공부와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일과 한거, 노동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가 된다. 오늘과 같이 일과 여가가 나눠져 일은 일대로 질곡으로 변해가고 여가는 여가대로 내 삶을 소모시켜나가는 상황과 대비된다. 일과 여가 모두가 참으로 귀중한 내 삶의 영역이고 시간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여가란 원래 한가로이 하는 것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여가는 갈수록 바빠지고 있다. 이 책의 제5장에서 소개하는 장자(莊子)의 관점에서 본다면 창조적인 여가 생활의 전제는 진정한 자유이다. 우리들을 얽어매고 있는 수많은 욕심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우리는 한가로움을 얻게 되며 여유로운 여가를 즐길 수 있다.이 맥락에서 오늘날 여가 시간이 증가하고 있지만 여유로움은 줄어들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활동으로 여가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의 여가(쉼)’가 중요하다.이 책의 결론은 새로운 여가관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관적 기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된 자기’로서의 인간 이해이다. 잘 산다는 것[웰빙]은 참된 자기를 깨닫고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이란 참된 자기를 깨닫기 위한 노력이며 낙도란 참된 자기의 자연을 즐기는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 책에서는 수행과 낙도(樂道)로서의 여가 시간 사용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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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 “아, 목동아!”라는 가사로 유명한
    “아, 목동아!”라는 가사로 유명한 ‘대니 보이’ 글 김정식 카피라이터 ‘대니 보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이렇게 시작되는 대니 보이(Danny boy)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일랜드 민요로 우리나라의 중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감성이 민감한 청소년 시기에 성악곡으로, 혹은 기악곡으로서 이 대니 보이를 익히는 것은 평생 간직하게 될 음악 재산이며 성인이 된 후에도 되새길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사실 학창시절에 이 노래를 배울 때는 노래의 자세한 배경은 미처 알지 못했더라도 번안 가사가 주는 시적인 분위기를 통해 목동, 초원, 장미, 사랑, 이별, 아일랜드의 고성 등 이미지의 편린들을 모자이크 하며 아름다움과 이상을 꿈꿀 수 있기에 인생에서 하나의 명곡이 주는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대니 보이’와 ‘런던데리 에어’는 결국 같은 곡민요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 노래가 전해왔기 때문에 그 노래의 발생 시기나 근원이 불명확하고 여러 설이 분분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의 작곡가이자 변호사인 프레데릭 에드워드 웨덜리(Frederic Edward Weatherly, 1848~1929)가 작사 작곡을 해 1910년에 대니 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1912년에 미국에 사는 그의 며느리가 런던데리 에어(The Londonderry Air)라는 제목의 악보를 입수해 웨덜리에게 보냈는데 이 노래가 대니 보이와 같은 노래라는 것을 알았고, 일부를 수정해 1913년에 개정 악보를 출판한 것이다. 대니 보이의 또 다른 이름인 런던데리 에어라는 제목에는 시대적,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런던데리 에어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던 북부 아일랜드와 브리튼 지역의 단합을 상징하는 용어이며 에어 즉 하늘이라는 말도 그 지역에서 즐겨 사용되는 용어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1800년대 중반부터 런던데리 에어라는 제목으로 비슷비슷한 곡들이 구전되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가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대니 보이는 단순히 목동과 연인과의 이별 노래는 아니고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애틋한 사랑의 노래로 암울했던 역사의 애환이 깔려있는 노래인 것이다.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산골짝 마다 울려 나오고,여름은 가고 장미꽃은 떨어지니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그 고운 꽃은 떨어져 죽고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내 자는 곳을 돌아봐 주며거룩하다고 불러 주오. 네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내 묻힌 무덤 따뜻하리라.너 항상 나를 사랑해 주면네가 올 때까지 내가 잘 자리라.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영원한 애창곡이기도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의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매년 3월17일 즉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이 가까워 오면 대니 보이가 수도 없이 많이 노래 불려진다. 가난과 압제 때문에 고향을 등졌던 그들이 오래 전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영원한 애창곡인 것이다. 대니 보이에는 당연히 수많은 버전의 연주와 노래가 있다. 실 오스틴(Sil Austin)이 색스혼으로 연주하는 대니 보이는 6, 70년대 한밤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단골 신청곡이었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적당히 센티멘털한 분위기가 젊은이들의 밤의 정서를 충족시켜 줬으리라. 지금 들으면 좀 단조롭기도 하다.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음반으로는 해리 베라폰테(Harry Belafonte)의 1959년 카네기 홀 공연실황으로 노래의 전반부를 완전 무반주로 노래하는데 지금 들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BMG레이블에서 나온 ‘The Fabulous Danny Boy album’이라는 CD로 대니 보이의 각기 다른 연주와 노래가 12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테너 마리오 란자(Mario Lanza)의 노래,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의 플루트연주, 오프라 하노이(Ofra Harnoy)의 첼로연주, 아더 휘들러(Arthur Fiedler)가 지휘하는 보스톤 팝스의 연주 등 이 CD 1장으로 대니 보이의 대한 다양한 면모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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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6
  •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에 대한 단상(斷想)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에 대한 단상(斷想)“신호등, 왜 설치한 거지?” 글 강현석(전 고양시장) 도시에서는 누구든 차를 운전해 집을 나오면 금방 교통 신호등을 만나게 된다. 운전자나 보행인이 신호등을 만나면 유쾌할까 짜증이 날까? 교통 소통을 원활하게 해 주고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있는 것이 교통신호등이다. 그런데 이것이 교통흐름을 막고 오히려 교통 체증을 부채질하게 되면 운전자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 집에서 차를 운전해 나오면 첫 번째 사거리에서 통상 신호에 걸린다. 다음 신호등은 이 사거리와 50m쯤 떨어진 왕복 8차선과 만나는 큰 사거리에 있다. 처음 만나는 사거리와 다음 사거리 교통 신호등의 신호는 4, 5초 정도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사거리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4, 5초쯤 있다가 다음 큰 사거리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는 것이다. 두 사거리 사이의 거리는 5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곳의 교통 흐름이 원활할 수 있을까? 첫 사거리의 교통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어도 큰 사거리 신호는 그대로 빨간불이기 때문에 작은 사거리에서 밀려있던 차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말이 작은 사거리지 진행 차선은 왕복 4차선 길로 진행하는 차가 많은 길이다, 잠시 후 큰 사거리 신호가 바뀌면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은 사거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얼마간 빠지기 시작하면 작은 사거리 신호는 빨간불로 바뀐다. 큰 사거리 신호는 계속 파란불이다. 큰 사거리의 신호는 아주 긴 편이다. 그렇지만 나가야 할 차는 이미 다 나가고 더 이상 나가야 할 차는 없다. 그런데 작은 사거리에서는 차들이 빨간 신호에 걸려 갈 수가 없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빨간불을 무시하고 그냥 달리기도 한다. 사거리 앞은 텅 빈 채로 파란신호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빈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 사거리 바로 옆은 경찰서 담장이다. 하루 이틀 이런 것이 아니다. 교통 담당 경찰은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에서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분은 아마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큰 사거리가 파란 불일 때 진행차선에 차가 없이 텅 비어 있었다면 작은 사거리 신호가 바뀌어도 차가 갈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 않느냐 할지도 모르겠다. 출퇴근 시간에는 큰 사거리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 차도 많고 출퇴근이 아니라도 작은 사거리에 좌회전이나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가 많이 진입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물론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의심이 간다면 현장을 한번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일산 초가집에서 저동 초, 중, 고를 지나 아이 스페이스 사거리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이 곳이다. 교통 신호등은 차량 소통을 원활히 하고 사고를 막기 위한 신호등 설치의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한다. 경찰서가 책임지고 운용해야 할 교통신호등은 많을 것이다. 이 많은 신호를 다 원활하게 운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 흐름을 잘 되게 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 한다. 신호등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혹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신호등은 없는지 확인하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교통경찰의 기본 임무일 것이다. 차량소통을 막고 있는 교통신호등의 잘못된 사례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대규모 택지개발 지구를 한 번 가보시라.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없고 통행인은 아예 없어도 예전에 쓰던 신호등은 그대로 남아 어김없이 작동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빨간 신호에 걸린 차는 하릴없이 기다린다. 오는 차가 한 대도 없어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차는 신호가 바뀔 때 까지 기다린다. 보는 이 없다고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일산에서 덕양구로 넘어가는 대곡역을 지나는 길은 속도가 60km로 제한되어 있다. 이 길을 제한 속도를 지키며 가는 차가 몇 대나 될까? 경찰순찰차가 이 길을 갈 때 몇 km로 달리는가를 묻고 싶다. 원래 속도제한이 70km였던 이 길이 언제부터인가 60Km로 바뀌었다. 70Km일 때도 대부분의 차는 80km이상으로 달리던 길이었다. 대다수의 차가 규정 속도를 한참 넘어 달리는 길을 규정 속도를 지키기 위해 천천히 달리면 오히려 사고를 유발하기 쉽다는 것은 운전자의 기본 상식이다. 이 길은 보행인이 아예 없는 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이 길의 속도제한을 이처럼 더 느리게 해 놨을까?거리를 달리다가 교통 신호가 연속해서 빨간불로 바뀌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이다. 파란불을 받고 출발했는데 다음 신호에서 빨간불에 걸리고 또 출발해서 조금 가면 또 걸리고... 이러한 도로는 신호등 간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다. 50m도 채 되지 않는 곳도 있다. 신호가 연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잘못된 신호등이나 교통정책을 시행하면서 이것을 무조건 운전자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직업인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는다. 더구나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경찰은 잘못된 교통신호등이나 교통표지판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며칠만 순찰을 돌면서 확인해 보면 잘못된 신호등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호 연동이 필요한 길과 신호등을 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택시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 신호 연동이 얼마나 차량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지를 일산 중앙로와 이면 도로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신호 연동이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고 비싼 기름 값을 절감할 수 있는지,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산 중앙로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신호가 연동되는 구간으로 차가 시원스럽게 달리는 것을 바로 확인 할 수 있는 곳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거나 바로 잡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국민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통신호등을 그렇게 운용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자동차 속도가 너무 빠르면 불법으로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치명적인 사고가 날 것이라는 등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론이 50m나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신호등에서 연속으로 신호에 걸리도록 신호를 조작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구차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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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6
  • 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④
    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④이슬람사회의 과거와 현재 - 메카입성과 모하메드의 사망 글 정상호 지난 다섯 번째 글에서는 모하메드가 그의 동조자들과 함께 메카 지배세력들의 탄압을 피해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긴 서기 622년 “헤지라”까지 이야기를 풀어나갔었다. 이번에는 그 후 무슬림들이 코레쉬족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내면서 아라비아반도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쌓고 결국엔 메카에 무혈입성을 하고 632년 모하메드의 사망에 이르는 시기까지를 서술하기로 하겠다. 코레쉬의 끊임없는 공격과 무슬림들의 연전연승헤지라가 있은 이후 무슬림 커뮤니티는 메디나에서 자리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코레쉬 부족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 두 세력은 바드르 전투에서 맞붙었으며,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코레쉬 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한편 바드르 전투 직전에 코레쉬 편을 들며 무슬림들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장했던 메디나의 유태인부족들은 전투가 끝난 후 메디나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헤지라 3년(서기 624년) 후에 코레쉬 부족은 다시3천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우후드 전투)했고 이번에도 무슬림들은 3대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코레쉬를 격파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일부 병사들이 모하메드의 명령을 어기고 적들을 추격하여 전리품을 노획하려다가 되돌아와서 반격을 시도하는 코레쉬 병사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고 모하메드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우후드 전투가 끝난 후에 무슬림들을 배반하고 코레쉬 편을 들어 내통했던 또 다른 유태인부족이 추방을 당한 바 있다. 우후드 전투가 있은 지 2년 후에 코레쉬는 3차 공격을 개시(참호전투)했다. 이들은 1만의 병력을 소집하여 메디나로 몰려가 도시를 포위하고 무슬림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도시 주변에 참호를 길게 파서 여기에 불을 질러 코레쉬 병력의 접근을 막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결국 코레쉬는 기다림에 지쳐서 메카로 되돌아갔고 이번에도 세 번째 유태인부족인 바누 쿠라이자가 코레쉬와 내통을 하는 것이 발각됐다. 이들은 자신들도 과거처럼 추방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모하메드는 다른 메디나 지도자들과의 기나긴 논쟁 끝에 쿠라이자 부족 남성 800명을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넘기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놓고 오늘날까지 일부 유태인학자나 서구학자들은 이를 무슬림-유태인간 불화의 근원으로 간주하거나 이슬람종교가 얼마나 잔혹한지를 잘 보여주는 초기의 사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슬림-유태인간의 반감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씨어도어허츨 같은 유태인지도자들이 주창한 시오니즘운동에 동참하여 유럽거주 유태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정착하고 1947년에 이스라엘이 공식독립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메디나의 쿠라이자 부족들은 원래 인종적으로 유태인이 아니라 유태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는 아라비아반도 토착인들 이었다고 한다. 또 7세기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 적과의 내통은 모두 사형 또는 노예 신분으로의 격하가 아주 당연한 처벌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그전에 두 유태인부족을 처형시키지 않고 추방으로 끝낸 것이 더 이례적이었다는 이견도 있긴 하다(Reza Aslan, No god But God, pp. 91-94 참조). 늘어나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참호전투는 엄격하게 말하면 무승부이기는 했으나 워낙 코레쉬 부족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만 해도 패배나 다름없었고 이에 따라 아라비아반도의 모든 부족들은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즉 모하메드가 이끄는 메디나의 신흥세력은 천하무적이며 이들의 뒤를 돌봐주는 신 또한 대단한 파워를 지닌 것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모하메드를 죽이는 것 또한 더욱더 어려워지게 됐다. 그럼에도 모하메드는 이전의 예언자들처럼 초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고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신도들을 얻어나갔다. 서기 7세기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개화되어서 비바람을 부르고 바다를 가르는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졌고 말씀 자체가 기적처럼 여겨지게 됐기 때문이다. 특별한 감흥을 주는 코란 낭송의 아름다움실제로 이슬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식은 독특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무슬림들이 코란을 낭송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키라우트”(qira’ut)는 음악적인 발성법이긴 했지만 음악과는 또 다른 면이 있었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부르는 성가와도 차이가 있었다. 즉 비신자가 듣기에도 낭송하는 코란의 내용뿐 아니라 그 소리로부터도 특별한 감흥을 얻을 수 있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도 코란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본이 많이 있지만 아랍어 버전만큼 권위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코란 낭송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이슬람 초기 에피소드는 오마르(나중에 2대 칼리프로 등극한 인물)가 어떻게 개종했는지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마르는 기골장대하고 성질이 급해서 마치 삼국지의 장비와 유사한 인물인데 그 또한 당시 메카의 지배계층이던 코레쉬족 출신 엘리트의 하나였다. 그런 그 자가 모하메드를 죽이려고 메카 저자 거리로 나서다가 자기 여동생이 나무 밑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코란을 낭독하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모하메드 가르침의 또 다른 특징은 아라비아 반도가 전통적으로 부족 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단 무슬림이기만 하면 부족 간 차이를 떠나서 모두 형제 사이임을 강조하여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이슬람의 가르침이 평화만을 내세우고 폭력은 금기시했다는 건 아니고 다만 그런 전투적 에너지를 이슬람권(Dar al-Islam) 바깥으로 돌리게 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모하메드의 메카입성과 아라비아 반도의 완전통일참호전투가 있은 지 2년 만에 모하메드는 어느 날 꿈속에서 자신이 메카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절을 드리는 이미지를 보게 됐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부관들에게 다들 짐을 싸서 메카로 순례를 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400명의 무슬림 신도들을 이끌고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메카 성문 앞으로 나아갔으나 도시 지도자들은 금년에는 순례를 할 수 없고 대신 내년에 다시 오면 평화적으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이는 메카가 모하메드에게 완전 손을 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헤지라 6년에 무슬림들은 메카로 가서 카바 신전을 참배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메카 지도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도시를 모하메드에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모하메드는 곧 카바로 가서 그곳에 모셔져 있던 모든 우상들을 때려 부수고 검은 운석이 모셔져 있는 이곳 카바를 이슬람 최고의 성소로 선언했다. 이로써 사실상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종교 이념 하에 완전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무슬림 사이에는 신분고하가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 모하메드의 마지막 설교헤지라 10년(서기 632년) 모하메드는 메카에 최후의 순례를 갔고 인근에 있는 아라파트 산정에서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여기서 모든 무슬림의 생명과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며,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인정하고, 무슬림들 간에는 어느 누구도 신분고하가 일체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 자신이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그 이후에는 어떠한 계시도 내려오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메카 설교에서 메디나로 돌아온 직후 모하메드는 병에 들었고 얼마 가지 않아 애처이자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 아부바크르의 딸인 아이샤의 무릎 위에 머리를 놓은 채 사망했다. 정상호성균관대학교를 졸업(경제학)하고 미국 뉴욕의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와이즈인포넷 전문위원, 삼성경제연구소 영문편집팀 편집장을 역임하고 2007년부터 최근까지 튀니지 국립 마누바대학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교수로 경제발전론을 강의했다. 현재는 귀국하여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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