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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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정인택의 성남읽기 기사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1
    압구정 그리고 로데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지난 주 압구정 얘기를 하면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눈길이 쏠렸습니다. 압구정로데오로 하여 <강남스타일>에 노랫말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청춘의 거리입니다.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사나이와 여자, 두 청춘남녀의 첫 만남이 성사된 장소가 압구정로데오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툭하면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단 사나이의 희망사항인 것은 분명하고요. 어쨌거나 사나이는 여자에게 뿅(?)간 상태.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 본 연재의 내용상 유래를 살피겠습니다. 서울 도심에 뜬금없이 ‘로데오(rodeo)’라니요? 일단 집히는 것은 청바지입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카우보이들이 즐겨 입었다는 Jean.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청바지와 로데오거리의 관련성을 딱 부러지게 아니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압구정동을 필두로 전국 각지의 로데오거리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리 양편으로 즐비한 패션몰, 아울렛. 연장된 분당선 전철에 압구정로데오역이 신설됐습니다. 거기 내려서 물었습니다. 카우보이들이 로데오에 도전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질문에 정답이라 할 만한 내용이 엉뚱하게도 황순원의 <소나기>에 들어있었습니다.  도시풍의 곱고 병약한 소녀에게 소년은 끌렸습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에다 촌티로 인한 열등감으로 소년은 말도 붙이지 못합니다. 소녀가 소년을 자극합니다. 조약돌을 집어던지며, “이 바보.” 소년이 앞장섰습니다, 소녀가 가고 싶어 하는 저 먼 산으로. 그 길에 송아지가 있었습니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에 올라타자, 놀란 송아지가 뿌리치려 합니다. 소년의 로데오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질어질, 위태위태.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 …… . 소년의 마음은 우쭐대는 기분으로 충만합니다. 즉 과시욕이 로데오의 동기였습니다.세월은 흘러 소년은 압구정로데오를 활보하는 청춘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병을 이겨낸 소녀의 청춘도 푸르기만 합니다. 한데 거리에 청춘들이 심각한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집채 만한 육중한 몸집의 황소, 그 등에 떠밀려 오르게 된 것입니다. 황소가 생난리를 칩니다. 쿵쿵쿵 쾅쾅쾅, 지축을 울립니다. 닥치는 대로 들이박습니다. 즈려밟고 짓이깁니다. 마구 날뜁니다. 국경선도 아랑곳없이 미쳐 날뜁니다.그런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황소입니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혹시 이중섭의 황소 ……?황소를 그릴 때 이중섭의 의식은 헝클어져 갔습니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감수해야 했던 전쟁의 후유증. 무너지는 의식 속에서도 이중섭은 격렬히 항거했습니다. 물질문명의 가공할 야만에 맨 몸End아리, 생명의 원초성으로 맞섰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섭의 황소일 리는 없습니다. 세련된 허우대도 그렇습니다. 살갗이 맨들맨들, 번지르르, 손가락으로 쓰윽 문지르면 점액질로 묻어나올 것만 같은 기름기. …… 예, 생각났습니다. 문제의 황소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상징물. 그 이름은 Charging Bull - 맹렬하게 돌진하는 황소. 로데오로 상대하기에는 이름이 위협적입니다. Charging Bull …….하지만 주눅 들 까닭 없습니다. 청춘의 삶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로데오스타일,           청춘은 로데오스타일         은근슬쩍 Wall Street  돈을, 돌고 돌아야 하는 돈을    억만장자 금고에, 통장에 쑤셔 넣기만 한다.   청춘의 빈 지갑은, 썰렁한 주머니는 모르는 일이라 하고  어려운 형편은 일시적일 것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Wall Street  돈의 회전을 막고도 태연하다. 부모님께 민망한 것이야 그렇다 치고, 사랑을 고백하고 흐른 세월이 몇 년이던가? 그 몇 년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어. 식을 올리자는 말도. 살림을 차리자는 말도.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겠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 …….   급기야 Wall Street      돈으로만 돈을 벌라고 한다.  땀으로 벌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소롭다고 한다.  새로 무엇을 차리느니 있는 기업에 투자하라고 하고  있는 기업에 인력은 적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렇게 Wall Street  돈으로만 돈을 벌라고 한다.   어질어질 위태위태   청춘은 로데오스타일   그러나 어림없다. 고삐를 꽉 움켜쥐고  제압하라, Charging Bull. 점령하라, Wall Street.  누가 능히 그리할 수 있는가? …… 청춘.  청춘은 로데오스타일이번 주는 엇길로 샜습니다. 양해를 구하고요,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명회의 압구정과 황희의 반구정. 이문형의 <압구정기>에 접근하기 위한 포석입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0-26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0
    성남시의 지명유래에 웬 압구정?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압구정(狎鷗亭)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정자입니다. 지은 사람은 한명회. 당대 명사들에게 한명회는 압구정의 소회를 담은 글을 청했답니다. 그러한 글을 통칭하여 <압구정기(狎鷗亭記)>. 수백 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지어 바친 이들이 수두룩했다는 얘기일진대, <압구정기>는 한명회가 누렸던 권세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아래는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압구정기>를 언급한 대목입니다. 〔명칭유래〕: (전략) ‘성남’이란 지명은 1530년 (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주목 누정조에 이문형(李文泂)〔? ~ 1466〕이 쓴 「압구정기(狎鷗亭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략)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역의 역사와 지명유래를 소개하는 책자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지리서입니다. 그만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후세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는데, 성남시의 경우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습니다. 산성, 도성 가릴 것 없이 城의 남쪽에 자리해야 城南입니다. 그리하여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도 城南을 남한산성 남쪽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은 남한산성 남쪽에 위치합니까? 이 물음에 답은 만인이 동일할 것입니다. 아니다! 아래는 김종직의 유고문집에 수록된 <압구정기>에서 城南이 나오는 부분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이문형의 城南은 다음에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 城南十里江如練(성남십리강여연) → 도성 남쪽 십 리엔 강물이 누인 베 같아라.* 一片城南地(일편성남지) → 도성 남쪽이 한 조각 땅이로세. 십 리는 4Km입니다. 한양도성 남쪽으로 4Km쯤 떨어진 지점에 한강이 있습니다. 북한산성이라면 8Km, 이십 리도 넘습니다. 반대 방향 남한산성도 8Km 이상 떨어져 있고요.  김종직의 <압구정기>에 표현된 城南은 현재 서울시 성동구에 왕십리, 금호동, 신당동, 옥수동 일대입니다. 이문형의 城南도 마찬가지. 수백 편에 달했다는 <압구정기> 전체에서 城南이란 표현은 더 있을 가능성이 큰데, 앞뒤 맥락이 어떠하든 간에 남한산성 남쪽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 더 남았습니다. 시기 설정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한명회, 이문형, 김종직 등이 활동했던 시기는 15세기입니다. 한데 15세기에는 남한산성이라 불리는 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 예전에 쌓았던 산성의 잔해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여, 학계에서는 그것이 신라 문무왕 때 축조된 주장성(晝長城)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쨌든 남한산성과 비견될 만한 규모에 城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도 인정합니다. 아래 내용을 보면 그것은 확실합니다. (전략) 남한산성에 대한 1595년의 수축과 1626년의 중개축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성남’이라는 명칭이 있었다는 것은 ‘성나미 = 성남’의 표기가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략) 위 문구를 필자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15세기 남한산에 城다운 城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그럼에도 남한산성 남쪽을 뜻하는 城南은 있었다. 현재 성남시가 바로 거기.  참 묘한 논리입니다. 아니 괴이하고도 황당한 주장입니다. 시기와 관련된 문제는 지명유래에 정설을 확정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검토 항목입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도 그 기본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아래 인용한 단대동(丹岱洞)의 유래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고증을 담당한 사람은 시기 설정의 오류를 근거로 주민들 사이에 떠도는 ‘속설’을 ‘허구’로 판정하였던 것입니다.  〔명칭유래〕: (전략) 일설에는 1973년 시 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는데, 그 고개의 흙이 붉었으므로 단대골,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조선시대 문헌에 단대(丹坮)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근거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단대동에 적용한 기준은 지명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지명에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남한산성은 16세기 말에 축성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얘기는 이러합니다. 남한산성 남쪽을 뜻하는 城南은 15세기에 이미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대체 이것이 말이 됩니까?<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지명유래는 시대의 요구에 걸맞게끔 다듬어야 합니다. 정확하도록, 풍요롭도록, 재미나도록 ……. 백만 인구를 헤아리는 성남시 아닙니까. 무엇보다 정확성에 투철해야 합니다. ‘꼬마버전 지명유래’도 정확성이 바탕입니다. 조선시대 한강 유역은 광주목에 속했습니다. 하여 <압구정기>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조에 수록됐던 바, 1970년대 성남시의 지명유래를 고증하던 사람들의 눈에 포착된 城南은 대단한 발견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허나 아닌 것은 아닌 것.여기까지로 이번 주에 끝을 맺겠습니다. 단 압구정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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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0-19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9
    산성은 육지 한가운데에 외로운 섬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조선시대 광주군은 대단히 넓었습니다. ‘넓을 광(廣) 자’ 廣州에 이름값을 하였던 것이지요. 현재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 전역과 서울시에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를 아울렀습니다. 가히 명실상부.서울이 광주를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1960년대 들어 한강 이남으로 손을 뻗쳐 강남구 지역을 성동구에 편입시키더니 아래로, 옆으로 점점 폭을 넓혔습니다. 강남구가 성동구에서 분리 독립한 해는 1975년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성남시가 없었다면 강남구는 성남구가 됐을 공산이 컸습니다. 서울시 성남구. 만약 서울시 성남구였다면, 城南에 城은 의심에 여지없이 한양도성입니다. 한강과 접한 지역 전체가 남한산성보다 북쪽에 위치하니, 남한산성은 거론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디지털성남문화대전>도 성남시 지명유래가 찜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근거도 불분명한 아래 해명은 싣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명칭유래〕: (전략) 따라서 ‘성남’은 성의 남쪽, 성 너머 저쪽, 재 너머 저쪽을 나타내는 것(성 = 잣 = 재)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평지성의 경우 성 안과 성 밖이 서로 대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 안(중부면 산성리)’과 ‘성 너머(나미)’가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도 불 수 있다.  城을 크게 산성과 평지성으로 나눈다면 평지성은 또 대도시의 도성(都城)과 시골의 읍성(邑城)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과 해미읍성으로 대표되는 읍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극심했던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해 해안가 고을에 쌓은 성곽으로, 세종 1년에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농민들은 읍성 밖에 오래도록 방치했던 땅을 개간할 수 있었습니다.읍성에서 주거지로 꼽을 공간은 성곽 안이었습니다. 가족의 안전도 생필품의 조달도 성곽 안이 유리했습니다. 한데 성곽 안 사람들이 배척하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무당, 광대, 백정 ……. 서럽고 한 많은 사람들이 읍성의 성곽 밖에 살면서 성곽 안을 동경했습니다. 도성은 읍성에 비해 상주인구가 많습니다. 많은 만큼 다양한 신분과 직종을 포용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는 도시인 것. 물자와 돈이 몰리고, 그것의 규모에 비례해 권력이 형성되는 곳이 바로 도시. 평화로운 시기에 읍성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도성은 치안확보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강, 절도 등 강력범죄가 빈발하여 도성의 담벼락에는 용의자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방이 나붙었고, 무기를 소지한 포도군관이 출입문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주된 소임은 검문검색. 민간인들에게 포도군관의 존재는 곧 권력입니다. 도성 밖 고을에 존경받는 어르신이 관찰사나 사또의 부름을 받아 성곽 안으로 들어섰다가,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성 안과 밖의 관계는 일방적이어서, 같은 머슴이라도 도성 안 머슴이 으스댔습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동, 성서, 성남, 성북은 그 점이지대에 있었습니다. 누리고 싶은 것들이 도시로 몰렸습니다. 생활에 요긴한 것부터 사치품까지. 시장, 침 튀기는 흥정, 학교, 치열한 경쟁 ……. 누리고 싶은 마음이 도성 밖 사람들에게 호기심, 동경심, 조바심, 두려움, 열등감 따위의 의식을 심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동, 성서, 성남, 성북 등의 지명 인식에 기반이었습니다. 기왕이면 도성과 연결의 끈을 맺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산성입니다. 산성의 성곽 안에는 누가 살았을까요? 봉홧불을 지필 이, 그는 등대지기마냥 고독한 사나이였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 절집이 있었다면 몇몇 승려들이 거했을 것이고, 심마니며 땅꾼, 사냥꾼은 움집을 짓고 며칠 묵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산성 안은 중심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성곽 밖에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동경의 눈길로 응시하지 않는 곳이 어찌 중심지 구실을 하겠습니까? 육지 한가운데에 외로운 섬, 그것이 산성 안의 처지였습니다. 한편 지역 전체가 산간 고지대인 지리산 일대는 산성이 주민들의 일상생활권역과 근접한 위치에 있습니다. 또 축조할 당시 성곽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제 육안으로 보이는 성곽이 지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허나 남한산성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눈을 치켜떠도 성곽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한양도성으로 쏠렸습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시기 인조 임금이 농성을 했던 45일 간 반짝했습니다. 온 백성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허나 그것이 전부, 육지 한가운데 외로운 섬으로 되돌아갔습니다.한양도성은 다릅니다. 성곽 대부분은 훼손돼 원형을 찾을 길 없지만 그것이 지닌 상징성, 중심지로서 지위는 더욱 강력해져 헌법재판소에서, ‘중국의 서울은 베이징, 영국의 서울은 런던, 대한민국의 서울은 서울이다.’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천도 불가! 보통명사 서울은 수도를 뜻하고, 고유명사 서울은 ‘오직 거기’를 가리키는데,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에서 서울과 서울은 일치해, 천도가 야기할 것은 정체성에 혼란이라는 것입니다.이렇듯 서울은 아성(牙城), 철옹성(鐵甕城), 불야성(不夜城). 그렇다면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성남은 어떤 城을 지향해야 할까요? 필자는 남한산성의 전례를 따라 농성(籠城)을 추구했으면 합니다. 농성의 여러 실행 방도 중에서도 철야음주가무농성을 ……. 하여간 필자는 누군가 옆에서 말려주어야 한다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마구마구 밟아요. 오줌이 마렵다고 휴게소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액셀러레이터를 그으냥!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에 다룰 주제는 이러합니다.<압구정기>에 표현된 城南, 그 城도 한양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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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0-10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8
    성남(城南)의 城은 남한산성이 아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남한산성이 아니면 무엇인가? 필자가 규명한 결과를 밝히겠습니다. 성남의 城은 한양도성입니다. 하지만 성남시민 대다수는 남한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수록된 성남시의 지명유래에도 남한산성입니다. 〔명칭유래〕: ‘성남’은 말 그대로 성의 남쪽, 남한산성 남쪽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성남을 예전에는 ‘성나미’로도 불렀다고 하며 이를 표기할 때 ‘성남(城南)’으로 썼다고 한다. (후략) 단대천이 복개되기 전 중앙동에 ‘성내미’라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술집 주인은 자신이 ‘성남토박이’인 것에 자긍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가 손님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는 것을 필자는 수차 들었습니다.  “성내미는 성남의 발음이 늘어진 것이거든. 성남시가 생기기 이전에도 토박이들은 여기를 성내미라고 불렀어. 그러니까 토박이들은 옛날부터 성남 사람이었던 것이지.” ‘성나미 → 성내미’로 발음되는 현상을 음운학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ㅣ모음 역행동화’입니다. 이것은 소수 한국인들에게 드러나는 현상이어서 표준어로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술집 ‘성내미’ 주인의 회고는 <디지털성남문화대전>과 일치합니다.한데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는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연혁〕: (전략) 중부면은 면 중앙에 남한산성의 준령이 있어 그 지역적 여건으로 주민들의 불편이 커지자, 1946년에는 종전 세촌면 관할 6개리(단대리, 수진리, 복정리, 상대원리, 창곡리, 탄리)를 관할하는 중부면 직할의 성남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성남’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인 행정명칭으로 처음 사용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후략)  먼저 거슬리는 표현을 지적하겠습니다. ‘남한산성의 준령’이라니요? ‘남한산 준령’입니다.곧장 넘어가겠습니다. 1946년, 이때에 광주군청 공무원들은 남한산성에 올라 방향을 실측하고선 지명을 결정했을까요? 만약에 실측했다면, 성서(城西)였습니다. 성남출장소 관할 지역 남한산 중부면사무소 관할 지역 위 도표를 보면 출장소를 설치한 내력이 간단하게 짐작됩니다. 남한산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대리, 수진리 주민들이 중부면사무소에 가려면. 당시 주민들은 오늘날 광주시로 통하는 갈마터널 쪽 고갯길을 우회했습니다. 고충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남출장소 관할 지역은 남한산을 중심으로 했을 때 서쪽입니다. 남쪽이 아닙니다. 성남이 남한산성의 남서쪽에 위치한다는 것은 분당구를 포함했을 때 그러한데, 1946년에 분당구 지역은 성남출장소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1946년에 성남(城南)으로 지명을 결정한 내력은 무엇일까? ‘단대출장소’를 물망에 올렸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타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표출될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수진출장소’, ‘상대원출장소’도 마찬가지. 이럴 때 손쉬운 해법이 있습니다. 두루 통용되는 지명, 대표지명이 있기만 한다면 그것을 채택하면 됩니다. 분당구 삼평동에 ‘성내미마을’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명확해집니다. 중원구 중앙동에 술집 ‘성내미’에다가 분당구 삼평동에 ‘성내미마을’, 지역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지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성남! 단 성남에 城은 남한산성이 아니었습니다. 한양도성이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에 문의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명에 유래가 된 城은 한양도성이랍니다. 북한산성이 아니고 한양도성. 서울시 성동(城東)구도 같았습니다. 성동구에 城도 한양도성.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에 이미 성동, 성서, 성남, 성북으로 인식된 지역이 있었습니다. 한양도성 동쪽 밖이 성동, 서쪽 밖이 성서, 남쪽 밖은 성남, 북쪽 밖은 성북. 넷 중 성북동만 행정구역상 지명으로 공인을 받았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성동, 성서, 성남, 성북을 행정구역에 명칭으로 정하기는 꺼렸을 것입니다.  대구광역시에 성서구가 있습니다. 대구도성 서쪽에 위치해서 성서. 즉 성동, 성서, 성남, 성북은 전국적으로 너무 많았습니다. 이웃 중국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겠지요. 일본도 역시 적지 않았을 터이고요. 지명은 고유명사입니다. 고유명사에 미덕은 유일성.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너무 흔한 것을 공식적인 지명으로 삼기는 그렇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성북구와 성동구, 대구에 성서구가 특별한 경우로 봐야 합니다. 경기도에 성남시도 그러하고요. 강동, 강서, 강남, 강북의 사례는 더합니다. 이러한 지명은 城을 쌓지 않았던 나라에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니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겠습니까? 필자는 서울시 강동구, 강서구, 강남구, 부산의 강서구도 예외적인 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에 다룰 주제는 ‘중심지가 될 수 없는 산성(山城)’입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9-25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7
    하천을 살리는 변화를 꿈꾸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먼저 얘기할 것은 갈현동과 도촌동이 중원구에서 미아가 돼 버린 내력입니다. 이를 위해 예전 면(面) 단위 행정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중 부 면               하대원리                 상대원리 ← 탄천                           대 원 천                                   남한산 줄기                  탑리      도촌리             갈현리                                        돌 마 면   남한산 능선을 따라 면이 달랐습니다. 상대원리, 하대원리는 중부면, 갈현리도촌리탑리는 돌마면 소속이었습니다. 중부면을 주축으로 광주대단지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돌마면에서는 분당신도시가, 지도에는 없지만 낙생면 일대에서 판교신도시가 형성됐습니다.   갈현리도촌리와 상대원리, 하대원리는 자연적으로 분리된 지역이었습니다. 지형, 생활권, 역사성 등 모든 면에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옛날 갈현리에 학동이 상대원리의 서당에 통학하는 것은 무난했습니다.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언덕을 넘기만 하면 되니까요. 야트막한 둔덕이었습니다. 쉬엄쉬엄 걸어가면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 친구들과 대원천에서 물장구치며 놀았음 직합니다. 목도 축이고요. 허나 현재 대원천은 복개돼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대원동             상대원동 ← 모란시장              공 단 로     2,3공단 →                               남 한 산 줄 기 ← 야탑사거리           대 원 로      광주시 →          야탑동     도촌동        갈현동   공단로와 대원로를 연결하기 위해 터널을 뚫었습니다. 대원터널. 터널은 길이가 일정 정도 되면 걸어서 통과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보로 통과했다고 칩시다. 시속 80킬로가 기본인 대원로에 횡단보도가 없습니다. 도로의 미덕은 먼 곳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한데 가까운 곳은 단절시키니, 그것 참 …….   원래부터 중원구에 속할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에서 분당구는 야탑동뿐,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갈현동과 도촌동 지역이 중원구에서 고립된 결정적 요인은 도로였습니다.      콘티빵 로고를 단 트럭이 공단로를 주름잡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유통기한에 구애를 받다 보니 콘티빵은 신속성에 목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제품이 아니라도 그랬습니다. 모든 기업이 ‘납기’를 맞추느라 허덕이던 시절, 트럭의 통행과 주차를 위해 대원천을 땅에 묻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원주민의 비율이 높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정 깊은 사람이 적다는 것도 하천 복개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청계천의 관 뚜껑은 열렸습니다. 하늘과 마주봅니다, 청계천의 물은. 그러기에 돈은 얼마나 들었을까요?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천문학적인 액수! 그래도 서울시민들은, 나아가 한국인 모두가 환영했습니다. 그에 힘입어 이명박은 대권을 거머쥐었고요.  독정천, 단대천, 대원천 중에 단대천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수정구와 중원구 가운데에 위치한 단대천입니다. 복개 된 위는 주차공간으로 쓰여 차량 통행도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돈과 수량(水量).   먼저 수량, 단대천은 건천(乾川)입니다. 건천은 자연 상태를 회복해도 효과는 별로입니다. 하여 청계천의 경우 한강물을 끌어올렸는데, 대원천의 물을 단대천에 합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여름에 홍수가 우려되면, 본래 물줄기대로 흐르도록 설계하면 될 것이고요.  다음으로 돈, 성남시의 재정으로는 무리입니다. 필자는 복개의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 봤습니다. 그랬더니, 광주대단지를 추진할 때 이미 하천의 복개는 예정된 일!   광주대단지는 정부정책이었습니다. 10만이 넘는 인원을 정부에서 직접 이주시켰고, 분양지 20평을 근간으로 도시를 구획한 쪽도 정부였습니다. 한데 수정로, 구 시청 앞 도로가 1차선이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독정천을 복개해 3차선으로 넓혔습니다.   독정천, 대원천의 잇따른 비보에도 단대천은 안전할 줄 알았습니다. 바로 옆 중앙로가 넓었으니까요. 그런데 웬걸, 주차난이 단대천의 숨통을 꽉 조였습니다. 분양지 20평의 후폭풍으로 불어 닥친 주차난이 …….   분양지 20평은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입니다. 20평씩 금을 그어 분할한 택지. 분양지 20평에 결과는 다닥다닥 붙은 집, 그리고 비좁은 골목이었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자가용 시대’를 예측 못한 탁상행정에 동네는 밤이면 밤마다, 일터로 나가는 꼭두새벽에도 어김없이 시끄러웠습니다. 차 빼!   단대천의 원상회복에는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비용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 사업에 드는 비용 일체는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합니다. 국가재정에 큰 부담은 아닙니다. 단대천은 구간이 짧은 하천이거든요. 한 3킬로? 아무튼 맺은 쪽에서 풀어야 합니다. 결자해지!     아이들은 물 흐르는 하천을 보고 자라야 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후보들에게 단대천 원상회복에 약속을 받아낼 절호의 기회 …….    다음 주에 다룰 주제는 ‘성남시 전체에 대표지명’입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9-14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6
    경계와 변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수진리 탄리 단대리 ← 탄천           단 대 천          남한산 → 하대원리 단대리   위 약식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현재 중앙로 일대입니다.   조선시대 지도에 등재된 지명은 대표지명으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리(里) 안에 또 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대리의 경우 현 은행시장 터는 ‘은행리’, 그 밑에 광산 김씨 집성촌은 ‘금광리’였던 식. 대표지명이든 소 지명이든 하천과 능선이 리와 리를 구분했습니다. 단 하천의 상류는 폭이 좁아 대표지명을 가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지도에서 단대리가 단대천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겠지요.   전체적으로 한적한 농촌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던 중에도 농경사회의 전통과 환경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수진리와 탄리 지역에 불도저가 나타나 임야를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광주대단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수진동 신흥동 단대동 은행동 ← 경부고속도로          중 앙 로                             단 대 천 성남동 중동 단대동 은행동   1973년, 성남시가 발족하면서 리는 동(洞)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진동과 단대동은 대표지명 수진리와 단대리를, 은행동은 소 지명 은행리를 계승했습니다. 중동은 새로 생긴 지명입니다. 단대동으로 묶기에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인데, 지명이 낯설기로는 신흥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탄동이 아니고 신흥동일까요?   탄리는 지명을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탄리의 터는 신흥동과, 지도에는 없지만 태평동이 차지했습니다. 신흥(新興)과 태평(太平), 이름에 담긴 뜻은 참 좋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하천의 이름이 탄천인 것을 감안하면, 이렇게 된 결과를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성남동도 뜻밖입니다. 인구과다로 하대원리에서 분리된 것은 그렇다 치고, 1960년대 초에 등장한 강력한 지명 ‘모란’이 있었으니 ‘모란동’이라 하면 될 것을 뜬금없이 성남시의 이름을 빌려 성남동이라니요!? 신흥동, 태평동, 성남동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도시에서는 어디나 도로가 지역을 구분합니다. 지도에 중앙로가 경계선의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의 종점이 중동과 단대동 접경지대에 있어, 단대동 뒤편으로는 차가 뜸했습니다. 중앙로가 단대동과 은행동을 가르지 못한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수진2,1동 신흥1,2동 단대1동 은행3동                           중 앙 로                           단 대 천 성남동 중동 단대2,3동 은행1,2동   1980년대 중반쯤입니다. 지속되는 인구 유입에 성남시는 분동으로 대처했습니다. 123동으로 쪼개면서 각각 동사무소를 설치한 것입니다. 중앙로도 차량이 넘쳤습니다. 건너려면 신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로써 단대1동과 23동이, 은행12동과 3동이 공유한 것은 지명뿐.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진동, 신흥동에는 다가구주택, 세칭 ‘빌라’ 바람이 불었습니다. 단독주택 두 채를 합쳐서 올린 3층짜리 빌라에는 여섯 가구가 삽니다. 즉 빌라가 분동의 주된 요인이었는데, 단대동과 은행동에 얼기설기 판잣집은 점점 위로 올랐습니다. 또한 단대천변 저지대에서는 빌라도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지상4층에 반지하1층. 빌라 한 채 당 열 가구.  단대천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갔습니다. 농업용수가 불필요해진 것은 이미 오래, 폐차가 나뒹굴고, 악취를 풍기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주차난으로 이웃 간에 시비가 끊이지 않자, 단대천을 향한 주민들의 회의감은 깊어 갔습니다. 도시에 개천이 무슨 쓸모람?                             수 정 구 수진1,2동 신흥1,2,,3동 단대동 양지동                           중 앙 로 성남동 중앙동 금광1,2동 은행1,2동                           중 원 구   현재 모습. 수정구, 중원구가 보입니다. 인구증가에 또 다른 대처가 구청의 설치였던 것. 단대천은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콘크리트로 덮고 말았습니다.    중앙로는 으뜸 경계선으로 지위를 굳혔습니다. 중앙로를 기준으로 수정구, 중원구로 확연히 갈라서게 된 것. 이는 지명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단대1동은 수정구, 단대2,3동은 중원구인 것이 합리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행동도 마찬가지.  금광동은 예전에 소 지명 금광리를 계승한 것입니다. 은행동의 경우는 수령 300년에 은행나무가 은행2동에 있어, 양지동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일은 은행3동이 맡아야 했습니다.  하천의 복개를 되새겨 봅시다. 단대천만 복개된 것이 아닙니다. 수진동과 태평동 사이를 흐르던 독정촌, 상대원동과 하대원동을 적시던 대원천도 복개됐습니다. 20세기가 거의 다 지나가는 시기에 복개된 하천이 이들 셋 외에 또 있을까요?   수정구와 중원구의 아이들에게 물으면, 자기가 사는 곳에는 하천이 없다고 합니다. 물이 흐르는 하천을 본 적이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것인데 …… 현실이 서글픕니다, 몹시도.   다음 주는 갈현동, 도촌동이 중원구의 미아가 돼 버린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9-14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5
    놀자, 중원구!  - 두 번째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유재석 담임샘이 칠판에 ‘여기’ 라고 적으셨어. 그리곤 말씀하셨어.  “너희는 여기 살고 나는 딴 데 산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나는 잘 몰라. 그런데 너희도 모르는 게 참 많구나. 내가 인터넷 사이트 중에 좋은 곳을 한 군데 소개해 줄게.”  담임님이 칠판에 쓰신 것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 노트북에는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초기화면이 이미 떠 있었어. 담임샘이 정형돈을 지목해 말씀하셨어.  “형돈아, 앞으로 나와서 단대동과 단대쇼핑을 검색해 봐라. 나도 궁금해. 단대동은 수정구, 단대쇼핑은 중원구에 있는 까닭이 뭔지?”   담임샘은 검색한 결과를 정리해서 모두에게 발표하라고 하셨어. 정형돈이 칠판에 ‘1989년’, ‘단대1동은 단대동’, ‘단대2동은 금광1동’, ‘단대3동은 금광2동’ 라고 쓰고선 말하였어.  “1989년에 중원구, 수정구가 생겼대. 그때 중원구에 속하게 된 단대2동과 3동은 이름을 새로 지었대. 금광1동, 금광2동. 이게 전부야. …… 아참, 단대쇼핑은 금광1동에 있어.”   설명은 짤막했지만, 다들 알아먹었어. 정형돈은 자리에 들어가고, 담임샘은 각자 나와서 지역에 궁금한 것을 검색해 보라고 하셨어. 제일 먼저 나간 사람은 박명수. 검색하고 난 뒤 박명수가 말했어.  “내가 검색한 것은 성남이야. 성남은 남한산성 남쪽이라는 뜻이래. 남한산성 남쪽!”  이런 식으로 몇 명 앞으로 나왔다 들어가고, 그 사이에 담임샘은 칠판을 지우고 새로 정리하셨어.   * 중원구에 속한 동은 총 9개 : 갈현동, 금광동, 도촌동, 상대원동, 성남동, 여수동, 은행동, 중앙동, 하대원동.   * 중원구 지명유래 등장하는 동은 딱 2개 : 중원구의 명칭은 중앙동(中央洞)의 중(中) 자와 상대원동(上大院洞)에서 원(院) 자를 합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송지효가 제기한 불만에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신 뒤, 유재석 담임샘이 물으셨어.  “중원구 지명유래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손들지 않았어. 틀렸을 까닭이 없지. 확실하니까. 담임샘의 질문이 이어졌어.  “중앙동과 상대원동이 선택된 까닭을 아는 사람?”  역시 아무도 손들지 않았어. 어떻게 알겠어, 그 까닭을. 담임샘이 말씀을 이으셨어.  “중원구 지명유래가 틀린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것이 유래의 전부일 수는 없어. 중앙동과 상대원동이 선택된 까닭을 설명해야만 중원구 지명유래는 완성될 수 있어.”  담임샘은 중원구 지명유래에 부족한 부분을 우리가 채우자며, 세 명 혹은 네 명씩 조를 짰어. 조에 부여된 과제는 동의 실태를 탐구해 발표하는 것.   동 갈현동 금광동 도촌동 상대원동 성남동 여수동 은행동 중앙동 하대원동 조장 게리 김종국 정형돈 하하 정준하 박명수 송지효 지석진 광수   조장들이 각 조의 탐구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에는 교장샘도 교실에 들어 오셨어. 이런 말씀을 하셨대. 그것 참 재밌겠다!   인구, 넓이, 높이 등 지명을 결정할 기준이 제시됐어. 그때마다 유불리에 조건이 달라져 찬반이 엇갈렸어. 지켜보시던 교장샘이 혀를 차셨어. 끌끌끌, 정말로 재밌다, 재밌어!  담임샘은 진작부터 아셨어. 타협안이 나오기 힘든 사안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담임샘도 승부를 가릴 방식을 제시하셨지. 그것도 세 가지나. 제비뽑기, 가위바위보, 사다리타기. 담임샘은 억울한 쪽이 없는 종목을 가려 뽑으신 것이야. 이런 말씀도 하셨어.  “실제 어떤 방식이 채택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공정성은 민주적 방식에 핵심적인 요소로써 …….”  그때였어. 광수가 무엇인가에 홀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어.  “선생님, 공정하면서도 재미있는 방식이 떠올랐어요. 그것은 바로 런닝맨! …… 뛰자!”  유재석 담임샘도 런닝맨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셨어. 단 주력, 지구력, 완력 등 런닝맨에는 공정성의 문제가 있어 망설이셨는데, 교장샘은 괜찮다고 하셨어. 만장일치인데 뭘.   운동장은 광수의 독무대였어. 괴력을 발휘한 것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능력자 김종국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 상태로 등에 붙어있던 금광동 이름표를 떼 버렸으니, 우와~!  김종국을 비롯한 탈락자들은 땅을 치며 아쉬움을 표했어. 그래도 결과는 모두 승복했지. 한데 광수, 송지효, 하하, 지석진만 남게 되자 응원석이 술렁이기 시작했어. 노홍철이 광수의 하대원동과 하하의 상대원동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문제를 제기했어.  “이러다가 대원구가 되는 거 아냐? …… 이건 가위바위보를 했어도 마찬가지야!”  기회의 불균등이 근본적인 문제였어. ‘대원’에게만 기회가 두 번이었던 것이야. 그렇다고 한쪽의 참가를 막을 수도 없는 일.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상황에 담임샘, 교장샘의 표정은 굳어지셨어. 하지만 운동장에 선수들은 응원석의 분위기를 느낄 여력이 없었어. 광수는 쫓아다니기에, 송지효, 하하, 지석진은 광수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야.   한데 어느 순간부터 광수는 송지효만 쫓아다녔어. 송지효가 생각하니,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야. 죽을 동 살 동 도망치면서도 따질 것은 따졌어. 광수도 할 말은 하였고.  “어째서 나만, 나만이냐고!”  “딱 한 명, 나는 딱 한 명만 상대해!”  “광수야, 그건 네 컨셉이 아냐. 정신 차리고 네 컨셉으로 돌아가, 광수야!”  “무릎 끓어! 네가 먼저 무릎 꿇으면 돌아갈 테니까, 무릎 꿇어!”  지구력의 한계에 도달한 송지효가 포기했어. 한데 손을 뻗으려던 순간 광수의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났어. 과도하게 뛰었던 결과. 바닥에 주저앉아 오른쪽 다리를 주무르는 광수의 등을 송지효가 톡톡 두드렸어.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면서.  송지효의 손이 착하기만 했을까? 그럴 리는 없지. 슬며시 이름표를 떼, 광수는 아웃. 그로써 ‘대원구’가 될 가능성은 0%. 노홍철은 품었던 불만 자체를 잊고 말았어. 한데 송지효, 긴장이 풀리면서 바닥에 드러누웠던 송지효에게 닥친 상황은 정반대였어.   겨우 숨을 추스른 송지효의 눈에 띈 얼굴에 주인공은 하하. 기회를 노리던 하하였어. 송지효가 허리를 일으켜야 이름표를 뗄 수 있었으니까. 그랬던 하하가 눈에 띈 순간 송지효의 머리는 텅 비고 말았어. 세상이 노래지면서 별이 깜빡깜빡 …… 경악!   “또, 또, 또 대원이!”  평소 당찬 송지효였어. 송지효의 표정이며 하는 말이 하하로서는 걱정스러웠어.  “또대원이? …… 아냐. 난 또대원이가 아니고 상대원이야.” 하하가 돌아앉아, 손가락으로 등에 붙은 이름표를 가리켰어. 하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 지석진이 하하를 살렸어. 지석진이 뗐어. 광수에게 질린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송지효의 이름표를. 송지효, 아웃. 게임 끝. 최후까지 남은 두 동은 중앙동과 상대원동.   은행나무 이파리가 낙엽으로 바람에 흩날릴 때면 유재석 선생님은 추억에 젖곤 하셔.  “그때 이후였어. 중원구 지명 문제로 런닝맨 시합을 벌이고 난 뒤부터 은행동에 은행잎이 유독 샛노래졌어. 하대원과 또대원이에게 질린, 노랗게 질린 송지효의 얼굴빛으로 물든 것이지. …… 송지효의 외침은 지금도 운동장을 떠돈단다, 선생님, 대체 정의란 무엇인가요?”  근데 이 전설은 중원구의 것일까, 은행동의 것일까? 선생님도 헷갈리신대. 믿거나 말거나.   마무리는 ‘꼰대버전’으로 짓겠습니다.  필자는 중원구의 지명유래에 착오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원동의 원’이 아니고 ‘상대원동-하대원동의 원’이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먹었습니다.   ‘제비뽑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어. 그랬다면 기존 기록에 착오는 없는 것이지.’  성남에 구는 민주화가 진척되는 단계에서 발족했습니다. 어떤 절차를 밟아 지명을 결정했는지, 상세한 기록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산교육 자료입니다.  잘 정리된 지명유래는 학교 수업 현장에서 폭넓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지명유래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에 제목은 ‘경계와 변화’입니다. 다소 철학적인가요?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9-07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4
    놀자, 중원구!   - 첫 번째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무엇을 하면서 노느냐 하면, 그건 런닝맨이야. 등에 찍찍이로 붙인 이름표를 서로 떼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런닝맨 말이야. 근데 교장샘은 런닝맨을 무한도전으로 아시고, 유재석 담임샘과 이런 말씀을 나누셨대.  “유 선생님, 산다는 것이 곧 무한도전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무한도전!”  “저기요, 무한도전이 아니고 런닝맨이거든요. 그래도 저야 뭐 상관없고요, 아무튼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장 선생님.”  나중에 교장샘은 이런 말씀도 하셨대.  “발로 뛰면서 지역을 익히겠다는 아이들이 참 기특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나는 1박2일로 놀겠다고 해도 허락했을 것입니다. 근데, 1박2일에도 유재석 선생님, 고맙다고 했을까?”    중원구 은행2동에 위치한 은행초등학교, 4학년하고도 *반이야. 지석진, 박명수, 정준하, 김종국, 길, 게리, 정형돈, 노홍철, 하하, 송지효, 광수 등등등이 수업하는 교실은. 그 교실에 꼬마들은 그날 일찌감치 뛰었어. 뜀박질, 런닝을 한 것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유재석 담임샘이 칠판에 ‘중원구에 속한 동한 동은 총 9개’ 라고 적으시고, 또 ‘중앙로’ 라고도 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어.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모란시장까지 이어지는 큰 길 있지? 그 길 이름이 중앙로거든, 중앙로를 기준으로 중원구, 수정구가 나눠져. 중앙로 저쪽 편은 수정구, 이쪽 편은 중원구. 지금부터 나와서 중원구에 속한 동 아홉 개의 이름을 하나씩 적는다. 시작!“  광수가 아는 동의 이름은 은행동뿐이야. 거기다 광수는 맨 뒷자리야. 그런 광수에게 필요한 것은? 스피드! 총알 같은, 번개 같은 스피드 …….      급히 설치면 사고가 나는 법이지. 광수는 제 풀에 넘어졌고, 제1착은 노홍철. 근데 노홍철이 쓴 동의 이름이 묘했어. 은행2동. 다음 차례는 길. 길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여유를 찾아 노홍철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어. 힌트를 얻었거든. 은행1동.   -잠시 ‘꼰대버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00년 묵은 은행나무에서 지명이 유래된 은행동(銀杏洞)은 광주대단지에 편입된 지역이 아닙니다. 광주대단지의 끝은 단대오거리 전철역 부근에 버스정류장 ‘구종점’. 1970년대 말까지 버스는 버텼습니다. 거기서 더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겠노라고.  광주대단지 이주민들 중에 분양받은 땅도 건사하기에 벅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브로커의 농간으로 땅값이 뛰었습니다. 당장 현금이 필요한지라, 분양지를 팔았지요. 그런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단지 뒤편에다 판자촌을 형성한 것이 은행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위로 올라갔습니다. 버스가 엄두도 못 내는 곳을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악착으로 대도시라면 어디라도 있는 동네 이름이 달동네, 별동네. 성남에 별동네는 은행1동에, 달동네는 은행2동에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별은행동, 달은행동. 그 은행(銀行)은 별똥별을 모아, 보름달이 초승달로 야위어가는 부분을 모아 모아서 차린 것. 달동네, 별동네의 애환에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銀杏과 銀行은 ‘터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속성이 같습니다. 갑시다, 은행 털러.    박명수는 상대원3동에서 작년에 전학 왔어. 박명수의 표정은 자신만만했지. 상대원3동. 그로부터 21로 내려가는 상대원 시리즈가 이어졌어. 그런데 송지효, 뛰어 나오긴 했지만 여섯 번째였던 송지효가 칠판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어.   ‘벌써 다섯 개가 나왔어. 총 아홉 개 중에 다섯 개가 벌써. …… 저건 아냐.’  이렇게 뜸 들이고 송지효가 적은 것은 은행동. 이어서 하하. 하하도 금방 적지는 않았어. 신중히 생각하고는 상대원동을 썼어. 다음은 광수. 광수는 상대원동에서 하대원동을 생각해 냈어. 본래는 하대원1동으로 적어, 하대원 시리즈를 시작할 작정이었지. 허나 마음을 바꿨어. 하대원동. 그리고 김종국은 금광동, 정준하는 모란동을 적었어.   순간 담임샘의 눈자위가 실룩이셨어. 이런 표정이셨어.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담임샘은 작년까지 이천, 평택에서 가르치셨어. 성남은 올해가 처음이셔. 그래도 모란시장은 알고 계셨지. 워낙 유명하잖아, 모란시장이.   올해 들어 퇴근길에 몇 번 들르신 담임샘은 모란시장 일대를 모란동이라고 생각하셨어. 의심할 까닭이 없지. 모란전철역에다가 교차로에 이름도 모란사거리이니까.   두 가지가 담임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어. 첫째는 정준하가 적은 모란동. 둘째는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옮겨 적은 중원구 9개 동의 명칭.   갈현동, 금광동, 도촌동, 상대원동, 성남동, 여수동, 은행동, 중동, 하대원동.  비로소 의식하신 것이야. 모란동은 없다!   정형돈은 담임샘이 하셨던 말씀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단대쇼핑은 큰 길 이쪽 편, 한신코아는 큰 길 저쪽 편. 짜자잔!”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정형돈이 쓴 것은 단대동. 한데 지석진이가,  “잠깐! 단대쇼핑은 큰 길 이쪽 편에 있지만, 단대동은 저쪽 편에 있어. 이건 확실해. 재작년에 우리 엄마가 단대동주민센터로 걸어서 출근하셨거든.”라고 제동을 걸었어. 지석진이 엄마를 내세우지 않았더라도 정형돈은 물러섰을 거야. 단대동은 저쪽이라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담임샘은 생각하셨어.  ‘모란동은 아예 없는데, 그냥 지나갔다. 이것은 모두가 착각에 빠졌다는 증거!’  지석진이 또 엄마를 앞세웠어. 현재 엄마는 중앙동주민센터에 근무하신다며 중앙동을 적은 거야. 중앙동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없었던 이름이야. 담임샘은 고개를 갸웃하시고, 게리가 중앙동 바로 밑에다가 중동이라고 적었어. 지석진이 말했어. 이름을 바꿨다고. 게리도 말했어. 그런 말 처음 들어 본다고. 그때 드디어 담임샘이 입을 여셨어.   “석진아, 이름이 바뀌었다는 증거를 제시해 봐.”   지석진이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어.  “작년에 주민센터 간판을 바꿔달아야 한다고, 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어요.”  그 말에 담임샘은 고개를 끄떡이셨어. 더불어 게리도 인정했어. 하지만 자기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했고, 담임샘은 게리의 주장을 수용하셨어.   갈현동, 도촌동, 성남동, 여수동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어. 결국 담임샘이 적으셨어. 중원구에 속한 9개 동 모두를 정리하여. 또 이런 내용도 적으셨어.    중원구 지명에 관련된 동은 딱 2개 : 중원구의 명칭은 중앙동(中央洞)의 중(中) 자와 상대원동(上大院洞)에서 원(院) 자를 합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중앙동은 중동을 고친 것.   다른 애들은 그러려니 했어. 송지효는 달랐어. 뚫어지게 보더니, 이렇게 말했어.   “중앙동, 상대원동, 지들이 뭔데!”  송지효의 이 발언으로 중원구 9개 동의 이름표를 단 꼬마들이 런닝맨, 출발선에 서게 되었어. 과연 어떻게 됐을까? 결과는 다름 주에 봐아~.   몇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첫째, 성남동이 생소한 것은 그 일대를 모란동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수동에 성남시청 청사가 있습니다. 한데 시민들은 성남시 청사가 분당구에 있다고 여깁니다. 사실 중원구와 분당구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셋째, 갈현동과 도촌동은 자동차 도로에 가려진 존재입니다. ‘고개 너머 동네’가 도로 건설 이후 ‘넘을 수 없는 고개’에 막혀 ‘걸어서는 못 가는 동네’가 되고 만 것입니다. 또 도로는 갈현동과 도촌동을 분당구 소속으로 여기게끔 하는 요소로도 작용합니다. 필자도 중원구인 것을 알고는, 참 의아했습니다. 여기가 왜 중원구야?   도로가 지역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8-31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3
    세부항목의 필요성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필자는 세부항목에 정설, 속설, 허구 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수정구(壽井區)에 수정은 수진동(壽進洞)에서 수, 복정동(福井洞)에서 정 자를 취한 합성지명'이라는 유래담은 정설입니다. 확고부동한 사실인 것입니다.창곡동(倉谷洞)에 창은 창고를 뜻하는 것이라, 창고의 용도에 관한 설이 여럿입니다. 이매동(二梅洞)의 경우도 어떤 매화나무였는지를 두고 설이 분분합니다. 또 상대원, 하대원에 대원(大院)은 절집과 서원으로 나눠집니다. 이들 유래담은 속설입니다. 필자가 성남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 그 무렵 단대동(丹垈洞)에 살았던 선배로부터 이런 얘기를 수차 들었습니다. “단대에 단은 붉을 단이거든. 왜 붉을 단이냐 하면, 광주대단지 때 파헤쳐 놓은 땅의 색깔이 붉었기 때문이야.” 그때는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광주대단지 이전에 지명도 단대였더군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따라서 선배가 들려준 유래담은 허구입니다. 정설, 속설, 허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정설 : 물증이 뚜렷하거나 정황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유래담.  속설 : 근거가 불분명한 가운데 주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래담.  허구 : 자료를 대조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유래담. 정설, 속설, 허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상대원하대원에서 대원의 실체가 절집이었다는 물증이 나타났다고 칩시다. 그로써 등급이 바꿉니다. 절집이 정설, 서원은 허구, 속설은 없습니다. 창곡동, 이매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속설 중 하나가 진짜배기, 사실이었다는 물증이 제시되면, 속설의 자리는 텅 비고 맙니다. 하나는 정설로, 나머지는 허구로 자리를 옮길 터이니까요. 정설, 속설, 허구가 혼재하는 유래담도 있습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분당동, 분당구의 기록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두 분당의 기록에서 취합한 정설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분점리(盆店里)의 분과 당우리(唐隅里)의 당을 취해 분당(盆唐)이다. 둘째, 당우리에 唐은 본래 堂이었다.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堂이 唐으로 바뀐 내력이 무엇인가? 질문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정답, 즉 정설을 도출해낼 만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당동의 결론이 그러했습니다. 추측성 어조로 끝을 맺어, 속설로 그쳤습니다. 고려 말기 중국에서 귀화한 당성(唐誠)의 후손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당(堂)’ 자 대신 ‘당(唐)’ 자를 (중략)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는 다른 내력이 분당구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분당구가 정성을 쏟은 것은 분당동 속설에 부당함을 입증하는 일.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분당동에 중국계 성씨인 신창 맹씨의 집성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堂이 唐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를 토대로 분당구는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분당(盆唐)은 ‘분당(盆堂)’으로 바로잡아야 할 땅이름이다.필자가 분당구의 논리 구조를 아래와 같이 요약했습니다. 본래 堂이었다. → 唐으로 바뀌긴 했는데, 그것과 중국계 성씨는 무관하다. → 따라서 堂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본래 堂이었다. → 唐으로 바뀌긴 했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내력은 모른다. → 따라서 堂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한 순간의 실수, 착각으로 堂이 唐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유가 그것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보고서는 이렇게 작성해도 됩니다. 堂이 唐으로 바뀐 내력은 한 순간의 실수, 착각. 그런 연후 ‘위원회’에서는 등급-정설 내지는 속설-을 매길 것입니다. 지명 변경은 정설로 공인된 상황에서 논의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한데 분당구에서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물론 모르는 상태에서도 보고서는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堂이 唐으로 바뀐 내력을 밝히지 못했음. 그것으로 끝입니다. 등급은 따질 까닭이 없고요. 이것이 일 처리에 정상적인 절차입니다.마지막으로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분당동에 삭제해야 마땅할 명백한 오류!분당동에 집성촌을 이뤘던 중국계 성씨는 신창 맹씨입니다. 한데 당성(唐誠), 밀양 당씨의 시조가 어째서 등장하는지요? 신창 맹씨의 시조는 맹의(孟儀)인데 말입니다.‘맹자(孟子) → 맹의 → 맹사성(孟思誠)’, 이렇게 맹씨로만 이어지는 가계에 당성이 낄 여지는 없습니다. 따라서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당성의 이름자가 거론된 자체가 잘못입니다. 응당 결례를 표해야겠지요. 죄송합니다, 당성 할아버지! 필자가 세부항목을 생각한 까닭은 지명유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는 정설, 속설, 허구 등의 인식이 이미 반영돼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 작성에 원칙으로 확립하지는 않아, 전체적으로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또 내용이 상충될 경우에 조정할 틀이 필요합니다. 필자라면 대화의 물꼬를 이렇게 틀 것입니다. “먼저 정설을 확립합시다.” 그런데 정설만 요긴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세상에 모든 전설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무슨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 속설과 허구는 지역을 사랑하는 주민들 마음에 산물입니다. 또 번뜩이는 기지에다가, 능청스레 시대상을 담아낸 창작품이기도 하고요. 소설은 엄두도 못 내지만 지명유래는 만만합니다. 재미는 또 얼마나 쏠쏠한지요. 예, 재미, 정설에서 재미는 추구할 것이 못됩니다. 속설과 허구는 표현하기 나름입니다. 그만큼 이야기로의 확장성이 풍부합니다.필자가 선배에게 전해 들었던 단대동의 유래담이 좋은 예입니다. 허구로 판명 났지만, 거기에는 광주대단지 시절에 막막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트럭에 실려 도착했더니 비바람을 피할 집은 보이지 않고, 드넓은 맨땅을 다지고 있는 불도저 …….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에는 ‘꼬마버전 지명유래’에 사례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8-24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2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분당동과 분당구, 그 꽉 막힌 소통!동일한 지명이면 유래도 같습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을 다시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복사하기’와 ‘붙이기’ 기능을 이용하면 됩니다. 물론 작성자가 다를 경우 복사에 앞서 양해는 필수적으로 구해야겠지요. 중원구에 상대원동과 하대원동이 그런 식으로 처리된 듯합니다. 〔명칭유래〕: 이 일대는 본래 보곡동(普谷洞)이었는데, 상대원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 중엽인 1225년경에 사원(寺院)이 건립되어 원터 또는 대원(大院)이라 부르다가 원터 위쪽을 상대원, 아래쪽을 하대원이라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집(李集)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이라고 한 데 대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宋言愼)의 서원이 있었던 이 지역을 ‘상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필자가 알기로 보곡동은 상대원동의 일부입니다. 인근에서 통하는 호칭은 ‘보통골’, 상대원동에서도 가장 높은, 남한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지리적으로 보곡동은 하대원동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하대원동의〔명칭유래〕난에서 보곡동 부분은 빠졌고, 나머지는 사실상 똑같습니다. ‘하대원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 중엽인 1225년경에 (중략)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집(李集)의 서원이 있었던 이 지역을 ‘하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복사하기와 붙이기에 장점은 편리입니다. 그런데 원본에 오류가 있으면, 그것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맙니다. 하대원동에 무덤이 있는 이집, 그가 조선 후기에 사람이라니요? 이집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입니다. 공민왕 때 신돈과 반목하여 연로한 아버지 이당(李唐)을 등에 업은 채로 경상도 영천까지 도피한 일화로 유명한 이집이었습니다. 상대원, 하대원에서 아쉬운 것은 그뿐입니다. 그렇다고 복사하기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원고에서 ‘내용은 나하고 같지만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럴 때는 각자 작성하는 것입니다. 담당자마다 나름의 개성대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필자는 분당동과 분당구의 유래는 복사하기, 붙이기 기능을 활용했어야 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일단 인용하겠습니다. *분당동은 전체, 분당구는 맨 끝부분.  분당동은 분점리의 ‘분’ 자와 당우리의 ‘당’ 자를 취하여 만든 합성 지명이다. 분점리(盆店里)는 동이를 구웠다는 옹기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당우리는 예전에 당집이 있어서 당우리(堂隅里), 즉 당 모퉁이 동네라고 하던 것을 후에 고려 말기 중국에서 귀화한 당성(唐誠)의 후손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당(堂)’ 자 대신 ‘당(唐)’ 자를 써서 당우리(堂隅里)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 혹자는 이곳이 신창맹씨(新昌孟氏)의 세거지로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므로 ‘당(唐)’ 자를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중국인이 거주하여 붙여진 서울의 당인리(唐人里), 당주동(唐珠洞), 또 중국과의 교역로로 인하여 붙여진 충남의 당진(唐津), 경기도 화성의 구봉산 당성(唐城)의 경우와는 다르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많으나, 그로 인하여 ‘당(唐)’ 자를 붙인 예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분당(盆唐)은 ‘분당(盆堂)’으로 바로잡아야 할 땅이름이다. 조사하는 주체가 다르고, 참고문헌과 현지에서 면접에 응한 사람이 다르고, 작업을 행한 시기가 다르면 결과가 다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십년 사이에 열 개도 넘는 유래담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 지명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요렇게 해서 우리 동네에 이름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며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 지명입니다. 그러니 내용이 다른 것이 무에 대수이겠습니까?다름을 조정함에 있어 원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원칙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담당자 개인들이 부딪쳐야 하므로, 공직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히 피곤한 일입니다. 또 연공서열의 관행이 살아있는 현실에서 과학성과 합리성은 무기력해지기 일쑤입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원칙의 가장 낮은 차원이 ‘다른 것을 그대로 복사하기’입니다.  ‘조정불가’의 상황에 봉착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필자도 수차 절감하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심을 전할 수 없는 사람의 벽을. 또 이런 생각도 이따금 합니다. 나, 아빠인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철근콘크리트 옹벽이 아닐까? 조정불가 상황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이 다른 것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분당동과 분당구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분당동의 원고 밑에 분당구의 것을 복사해서 붙이고, 분당구의 원고 아래에도 그렇게 ……. 이 상태로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담당자를 바꿔서라도 조정에 나섭니다. 더불어 필자도 덜 번거로웠을 터이고요. 처음 분당동의 것을 읽었습니다. 이상한 대목이 있어 분당구로 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내용이 서로 충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용 파악을 잘못했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재차 읽었더니, 멍했습니다. 뭐야, 도대체?!프린터를 켰습니다. 분당동의 것을 프린트했습니다. 프린트한 것을 손에 쥐고 분당구의 그것을 화면에 띄워, 둘을 비교하면서 살폈습니다. 그랬던 결과, 슬펐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을까요? 이 의문에 성남시청은 과연 답을 할까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대해서는 옹벽이었다는 평을 들어 마땅한 성남시청에 얘기합니다. ‘꼬마버전 지명유래’는 정말이지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현 상태로 그것은 불가합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에는 다름을 조정할 원칙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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