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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2.11.0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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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압구정과 황희의 반구정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한양도성의 북쪽 임진강 어귀에는 반구정(伴鷗亭), 남쪽 한강변에는 압구정(狎鷗亭)이 있었습니다. 伴鷗는 갈매기와 반려한다, 狎鷗는 격식을 가리지 않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니, 유유자적한 삶을 상징하는 정자의 이름으로는 썩 잘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귀거래(歸去來)도 정자와 썩 잘 어울리는 낱말입니다.
관직은 종신직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짐을 꾸려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귀향하는 은퇴 관리의 귀향을 일러 귀거래. 정자는 귀거래 이후의 삶을 유유자적하며 보내는 곳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귀거래와 관련하여 두고두고 얘기되는 정자가 둘 있습니다. 반구정과 압구정.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낸 이는 황희입니다.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2년 남짓. 세종이 한사코 놓아주지 않아 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압구정을 지을 무렵 한명회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압구정기>를 지은 인물 중에 안지(安止)가 세조 10년(1264년)에 졸한 것으로 보아 그러합니다. 귀거래하기에는 이른 시기. 하여 이문형은 대업을 이룬 연후에 갈매기를 벗하라는 덕담을 남겼는데, 말년에 한명회는 쫓겨났습니다. 귀거래마저 불가한 처지로 몰린 것. 그럼에도 <압구정기>는 계속 나왔습니다. 이런 내용으로요. 주인은 어디 가고 갈매기 혼자 노니는가 …….

현재 반구정은 경기도 지정문화재입니다. 그런데 옛 건물이 아닙니다. 6.25 때 전소된 것을 복구한 것입니다. 또 그런데 6.25 때 전소된 것도 황희가 생존했던 시기의 것은 아닙니다. 황희의 손때가 묻은 반구정은 오래 가지 못했답니다. 양질의 목재를 쓰지 않았던 결과였겠지요.
황희의 넉넉한 인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립습니다. 사라진 반구정이 새로 지어지는 내력,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바탕이 바로 그것입니다. 황희를 추념하고자 함. 
압구정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한데 언제 없어졌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단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벌어진 당일까지는 건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래는 고종 임금이 보고 받은 갑신정변의 수사 결과입니다. 

죄인 윤경순(尹景純)의 결안(結案)에, 압구정(狎鷗亭)에 모여 사냥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몰래 우정국(郵征局)에 가서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러 ……. -<고종실록> 고종 22년 12월 23일 자 기사 중에서.

여기에 왜 압구정이 등장하는가? 압구정에 마지막 소유자가 박영효였습니다. 위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박영효가 압구정을 갑신정변에 근거지로 활용하였음을.
갑신정변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음으로써, ‘저주 받은 혁명’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당시 민중들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일러 ‘갑신5적’으로 규탄했습니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 족보에서 이름자가 지워졌습니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뒤 운종가에 내걸린 김옥균의 목에 민초들은 돌을 던졌습니다. 홍영식은 일본으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모시겠다고 남았는데, 고종이 보는 앞에서 피살됐습니다. 이후 홍영식의 아버지와 처는 자결. 서재필의 처도 주위의 시선에 견디다 못해 목을 맸습니다. 그 아래서 칭얼대던 젖먹이 아이는 굶주림을 못 이겨 ……. 
그렇듯 갑신정변에 대한 민심이 사나울 때, 압구정은 인근 주민들이 몰려가 무너뜨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갑신정변과 반대로 계유정변은 성공한 쿠데타입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변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해 압구정을 지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압구정은 팔자가 참 드센 정자였습니다. 한명회 당대에 ‘주인이 스스로 판 무덤’이라는 저주서린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무덤에 덜컥 발을 내딛고서는, 한명회가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걸로 끝.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신(臣)이 압구정(狎鷗亭)을 지은 것을 깊이 뉘우칩니다.” -<성종실록>, 성종 11년 6월 7일 자 기사 중에서.

명나라 외교사절이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자, 한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용과 봉황을 수놓은 임금 전용 햇볕가리개-을 내달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신하로서 절대 넘어서는 아니 될 선을 넘고 말았던 것. 탄핵이 빗발쳤고, 이후 추락은 끝도 없었습니다. 투옥, 유배, 쓸쓸한 죽음, 부관참시, 후세들의 조롱 …….
박영효도 인생 후반부에는 오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습니다. 친일파로 이완용을 방불케 하는 짓거리를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반구정과 비교하자면, 압구정은 주인을 잘못 만난 듯합니다. 정자의 운명도 주인의 평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일까요?

다음 주에는 이문형의 <압구정기>에 표현된 城南에 城이 한양도성인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 이전에 귀거래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해 이번 회 내용을 채웠습니다.
현대시에도 귀거래의 미덕을 노래한 작품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꽃이 지는 자연의 섭리를 귀거래에 비유한 이형기의 <낙화(落花)>. <낙화> 1연을 여운으로 남기려 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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