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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2.11.1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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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이 아니라는 네 가지 근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위 지도에 의하면 남한산성 남쪽은 현재 광주시입니다. 따라서 남한산성이 지명 형성에 근원으로 작용했다면 ‘성남마을, 성나미마을, 성내미마을’ 등은 광주시에 흩어져 있어야 합니다. 즉 城南이 대표지명이어야 할 곳은 현재 광주시입니다.
1946년에 성남출장소는 광주군청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지명을 두고 지역 간에 갈등이 생겼다면 광주군청이 중재에 나섰겠지요. 그리고 중재안도 아주 쉽게 나옵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서쪽은 城西, 남쪽은 城南. 이 중재안을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분규 자체가 없었습니다. 1973년 성남시가 광주군에서 분리 독립할 때에도 지명에 관한 시비는 전혀 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명 형성에 근원이 남한산성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근거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교통.  
광주시도 성남시처럼 서울시와 경계선을 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로 곧장 가기는 어렵습니다. 까닭은 해발 480미터 남한산이 서울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 하여 서울시에 용무가 있는 광주시민들은 성남시를 거쳐 갑니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곧장 갈 수 없으므로 광주시에서는 城南이란 지명 인식이 성립하기 힘듭니다. 성남시 일대는 다릅니다. 성남시는 전체적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길도 평탄하여 여기도 저기도 城南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근거는 여행객들의 지명 인식입니다. 
대과에 응시하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경상도 유생들의 길을 짚어 봅시다. 문경새재 이후에 행로는 충주, 음성, 장호원, 이천, 광주 ……. 광주시에서 서울로 가려면 성남시를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광주군 낙생면-현 성남시 분당구-에는 관에서 운영하는 역원이 있었습니다. 유생들의 상당수가 낙생 역원을 찾았을 것입니다. 역원 인근의 객주(客酒)도 대목을 맞았겠지요. 속된 말로 눈 빠지게 기다렸던 ‘대박 시즌’ 아니겠습니까.
낙생면 다음에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먼저 남대문 코스. 이 코스는 청계산을 우회해 과천으로 빠집니다. 다음은 동대문 코스. 이 코스는 탄천의 흐름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도중에 양재천을 합류해 한강에 닿는 것이지요.
둘 중 동대문 코스에 집중해 봅시다. 오늘날 분당선 전철 노선을 따라 유생들이 숙식을 의탁하던 민박집들이 늘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한양 입성이 하루면 가능하니 일찍 도착한 유생들은 서두를 까닭이 없을 터, 경비가 넉넉지 않으면 한양에서의 체류는 짧을수록 좋습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코 베이는 데가 한양이니까요.
만약 경상도 안동에 유생들이 술자리에서 ‘한양도성 남쪽에서 며칠 머문 집’의 인심을 회고했다면 그 집에 소재지는 어디일까요? 현재 성남시와 서울시 강남구입니다.

네 번째, 한양 가까이에 한양도성과 경쟁할 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권근의 한시에 <春日城南卽事(춘일성남즉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봄날 城南에서 있었던 일. 하지만 그 城을 한양도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곽이 완성됐다고 해서 곧장 城南이란 지명 인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개성으로 환도한 일도 있어 그렇습니다. 또 시의 내용도 지극히 낭만적인 것으로 보아 권근이 젊은 시절 썼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春日城南卽事>에 城은 개성도성입니다. 따라서 城南은 경기도 개풍군에 어디쯤이었겠지요. 개풍군은 소설가 박완서의 고향입니다. 
권근과 박완서 사이에는 6백년 세월의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게 6백년은 찰나일 수도 있습니다. 권근의 <春日城南卽事>에 표현된 杏花(행화), 살구꽃이 박완서의 고향 얘기가 담긴 <그 여자네 집>에서 살아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마을엔 꽈리뿐 아니라 살구나무도 흔했다.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여북해야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였겠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살구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개성도 나옵니다. 박완서는 어릴 적 개성에 갔다가 도시가 주는 묘한 매력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한데 城南은 나오지 않습니다. 개풍군에 城南이라는 지명을 가진 행정구역은 없습니다.
왕조가 지속됐던 기간은 엇비슷합니다. 고려도 조선도 줄잡아 5백년. 따라서 개성도성을 중심으로 해서도 성동 성서 성남 성북이라는 지명 인식은 형성되었겠지요. 문제는 개성과 한양이 너무 가깝다는 데 있었습니다. 지명이 긴장을 유발시킵니다. 한양도성을 따르는 城北이 있는데, 거기서 얼마 안 가 개성도성을 추종하는 城南이 있는 상황은.
절대왕정 시대에 도읍지는 가히 성역입니다. 그 가까이에 중심지 구실을 하는 城은 절대금기. 허나 자연은 무심합니다. 살구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

이렇게 아무리 따져 봐도 城南에 城은 한양도성입니다. 이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어질 내용은 이렇습니다. 군사정권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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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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