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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2.11.2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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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착각 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본 연재 3회에서 필자는 지명유래를 정설, 속설, 허구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여러 설이 분분할 때는 ‘정설부터 확립하는 수순’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추출할 수 있는 정설은 아래 두 가지입니다.

첫째, 조선시대에 이미 城南은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공식적인 지명으로는 1946년 성남출장소가 처음이다. 이후 64년과 68년의 성남출장소, 그리고 73년의 성남시는 이전의 지명을 계승한 것이다.
 
이외의 기록은 모두 추측입니다. 필자가 제기한 한양도성 설도 지금 현재 수준으로서는 추측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속설에 해당될 것인데, 관건은 신빙성입니다. 어떤 속설이 더 믿을 만한가?
정설도, 속설도, 허구도 모두 소중합니다. 향토를 사랑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에는 시대상이 반영돼 있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상징성이 서울시 성북구와 성동구의 지명을 낳았습니다. 성남시 지명의 모태도 한양도성이라고 필자는 앞에서 누누이 얘기했습니다. 나아가 필자는 남한산성 설도 시대의 산물이라고 여깁니다.
현재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기록된 지명유래는 1973년 이후에 성립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출장소는 임시 행정구역이라 지명의 내력을 고증하여 문헌으로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1973년, 그 무렵에 이르면 남한산성은 아주 유명했습니다. 남한산은 몰라도 남한산성은 다들 알았습니다. 남한산성 설은 그러했던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1961년 5월 16일 일부 정치군인들이 병력을 이끌고 와 수도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그로써 모든 서울시민들이 총알받이 신세로 몰렸습니다. 이는 정치군인들의 작전에 포함된 내용이었습니다. 군인정신에 투철한 군인들이 지휘체계를 바로잡겠다고 진압하려든다면, 어디 한번 붙어 보자는 것입니다. 시가전 중에 무고한 서울시민들이 희생될 것은 자명한 일.
1979년 12월 12일의 신군부 쿠데타에서 특전사와 수방사의 지휘관이 진압하려 하자 하나회 소속 대령들이 하극상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동했다고 치더라도 이미 서울시내에 진입한 상황에서 두 지휘관은 실탄 발사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쿠데타 성공의 이면에는 서울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재수 없으면 총 맞아 죽는 서울시민들이 …….

정치군인들이 내건 명분은 안보였습니다. 안보 없으면 모든 게 없다.
전방의 병력을 빼돌리고 안보라니, 일단 그것이 궤변이었습니다. 한데 남한산성이 안보에 교묘하게 이용되었습니다.
정치군인들에 의하면, 병자호란 패배에 주된 요인은 국론의 분열이었습니다. 당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정부정책 아래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정책과 다른 목소리는 일절 내지 마라.
그렇다면 병자호란 직전에 당쟁은 극심했던가? 필자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전혀 아니었음. 특히 대외정책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나 다름없었음. 허나 그것은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본 글에 핵심은 남한산성. 정치군인들은 남한산성을 안보 교육장으로 삼았습니다.
대학생들의 남한산성 순례는 정규 수업이 됐습니다. ROTC 학생들의 방학 중 훈련 장소도 남한산성이었습니다. 국군 체육부대를 비롯한 군부대가 인근에 들어섰습니다.
결정적인 시설이 부산에서 옮겨 왔습니다. 1962년 수정구 창곡동으로 육군형무소가.

군은 남한산성을 공식 명칭으로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남한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데 필자가 현역으로 복무할 때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돼 형을 마친 이들의 사연이 담긴 책을 읽은 적 있습니다. 제목은 <남한산성에서 부는 바람>. 제목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육군형무소에 공식 명칭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물론 처음부터 남한산성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자, 면회 가려는 가족들에게 남한산성을 안내했던 것이 발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에서 표현했던 대로 남한산은 몰라도 남한산성은 알아차렸거든요.
남한산성이 육군형무소의 별칭으로 통하게 되자 현역 군인들에게 그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혹독한 얼차려 중에 ‘남한산성에 가 봐라. 거기서는 찬물만 끼얹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려서도 코를 골면서 잔다.’ 라는 말을 듣기는 예사였고, 한번 끌려갔다 하면 살아서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더디더라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하지만 남한산성 시계는 멈춘 시계.’

그때에 민간인인들 별수 있었겠습니까. 군사정권의 정책에 시큰둥한 목소리에는 여지없이 공권력이 따라붙었는데, 연행된 모처가 어디인 줄도 몰라서 가족들이 발을 동동 굴리던 시대. 모처의 요원들은 극단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사람을 짐승 취급해도 무방한 자유까지.
한데 그 과거사를 시대 상황의 논리로 얼렁뚱땅 넘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심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국가권력의 과오 중에 세월이 흘러도 용납해서는 아니 될 일이 무엇인지?
더 근본적으로, 국가가 왜 있는지?

이번 주는 여기까지. 하던 이야기는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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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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