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0(월)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2.12.17 13:22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9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아래에 두 기록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두 기록에 의거하여 성남시청에 묻겠습니다. 현재 중앙동 지역은 1973년 7월 이전 어디에 속했습니까? 단대리입니까, 탄리입니까?

* 과거 단대리는 현재의 단대동, 금광동, 중앙동, 은행동 전역과 신흥동 및 성남동 일부를 포합하였다. -단대동의 ‘형성 및 변천’에서.

* 1973년 7월 성남시로 승격됨에 따라 탄리 지역을 성남동, 신흥동, 태평동, 중앙동으로 분할할 때 분리 독립하였다. -중앙동의 ‘형성 및 변천’에서.

필자가 탐문한 결과는 단대동의 기록이 옳았습니다. 나아가 중앙동의 기록에서는 성남동도 탄리에 속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역시 오류입니다. 성남동은 하대원리와 단대리의 일부를 합쳐 새로 만든 동입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가장 큰 문제는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필자는 지난 호 인터뷰에서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을 방도를 제시했습니다.
그 방안은 수정된 원고 초안을 인터넷에 올려 공개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최종안을 확정해 나가는 것.
 
탄리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 터가 어디였는지를 확정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살핀 결과는 이렇습니다. 현재 태평동은 전 지역이, 신흥동도 대부분의 지역이 탄리에 속했습니다. 다만 신흥동에서 단대동과 인접한 곳은 단대리였습니다.
한데 1973년 탄리는 홀로 유독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왕따!
성남시가 발족할 당시 인구 증가로 분할된 행정구역은 탄리, 단대리, 하대원리 등 세 군데였습니다. 탄리는 태평동과 신흥동으로, 단대리는 단대동과 중앙동으로, 하대원리는 하대원동과 성남동으로 분할됐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탄동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남시가 발족하면서 리(里) 단위 행정구역은 모두 동(洞) 단위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지명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분당구의 예를 들더라도 야탑리는 야탑동으로, 서현리는 서현동으로, 율리는 율동으로, 하산운리는 하산운동으로 ……. 이렇듯 지명은 그대로인 채 리가 동으로 대체됐을 따름이었습니다. 
오직 탄리뿐이었습니다. 탄리에 탄만 지명으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민들이 그것을 모른 체 했을까요? 필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주민들은 이런 현수막을 길거리에 내걸었을지도 모릅니다.
‘탄리(炭里)가 탄천(炭川)의 모태였던 것을 성남시청은 자각하라!’
 
<디지털성남문화대전>은 삼천갑자동방삭의 설화를 탄천의 지명유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 내용을 꽁트 형식으로 써서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허나 지명유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승사자가 숯막에 숨어들었을 때 하천의 이름은 이미 숯내였다는 식이었습니다. 전국에 산재했던 모든 숯내에 동방삭 설화가 전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는 또 다른 유래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남여이의 호 탄수(炭搜)에서 탄리와 탄천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 하지만 <태종실록>에 실린 아래 기록은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명백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근처 경기도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 대간에서 호종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저녁에 광주(廣州) 탄천(炭川)에 머물렀다. -태종 7년 -1407년- 10월 12일.
 
탄천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군사훈련과 관련된 유래가 전합니다. 대규모 열병식을 했는데, 그때 조리에 쓰인 숯의 잔해가 상당해 탄천으로 불렸다는 것. 한데 위 기록을 보면 태종은 군사훈련을 탄천에서 참관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데서 보고 밤을 탄천 어귀에서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태종 7년이면 조선이 건국되고 15년밖에 안된 시기입니다. 또 고려 말에 이미 고위관리였다가 조선 건국 후에도 생존했던 이지직의 호가 탄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사훈련에서 탄천의 지명이 나왔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다른 의문이 있습니다. 탄천과 탄리, 지명의 원조는 어느 쪽일까요?
보통은 마을 이름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확인 불가, 하지만 탄리의 지명이 상실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면 주민들이 어렵게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탄리가 탄천의 모태라면서 ‘지명 사수 운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가까운 수원시가 지명 시비로 시끄럽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수원시 장안구 광교산에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 광교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은 위 아래로 구분돼 현재 법정동은 상광교동, 하광교동입니다. 주민은 총 600명 정도. 인구가 적다보니 행정업무는 이웃 연무동의 동사무소를 이용합니다. 따라서 행정동은 연무동이지요.
  수원시청에서 영통구에 광교신도시를 개발했습니다. 주민들이 입주하자 행정동을 신설, 명칭을 광교동으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광교마을 주민들이 지명의 고유성을 침해했다며 시위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항의합니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탄천탄리’의 관계는 ‘광교산광교마을’과 동일합니다. 아니 보다 더 끈끈했을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하천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그렇습니다. 한데 1973년 탄리가 탄동이 되지 못하였을 때 주민들은 ‘그러려니’ 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탄리는 왜 탄동이 되지 못했을까? ①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