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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3.12.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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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⑪
인도의 무갈제국
 
정상호(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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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피소드에서는 역사적 서술을 잠시 벗어나 이슬람 철학과 수피전통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호부터는 중세 후기로 접어들던 14세기 전후에, 발칸반도에서 중앙아시아 옥서스강(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걸쳐 흐르는 아무다르야)까지 그리고 모로코에서 인도 및 방글라데시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3~4세기 동안(오토만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까지 6세기 동안) 거느렸던 3개 이슬람 제국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화약의 제국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토만 제국(1299-1923), 오늘날의 이란에 세워졌던 사파비드 제국(1501-1736), 인도 및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거의 통치했던 무갈제국(1526-1857)은 보통 싸잡아서 ‘화약의 제국’이라고 불려왔다. 그 이유는 이들 3개 제국이 포병대를 전투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최초의 왕조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포병대 활용이 이들이 최초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화약의 제국이란 표현은 ‘화약의 시대’에 세워진 제국‘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이들 세 제국의 공통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 세 제국은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지배층들은 모두 투르크-페르샤계 민족이었고 원래 해당지역에 거주하던 토착민족을 외래 민족들이 들어와 지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들은 모두 농업 중심국이었으나 사파비드는 국고 수입을 실크 판매에 거의 의존했고 오토만과 무갈은 건조지대에서 출발하여 농토가 비옥한 지역을 차츰 정복하여 나중에는 농업 및 수공업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또 이들은 모두 강대국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었으나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18세기 이후 유럽 열강들의 침탈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각 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더 자세히 언급이 되겠지만 지도자들이 근대화 개혁을 단순히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도로만 이해하여 유럽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조직을 개편하는데 머물렀을 뿐, 보다 근본적인 정치·사회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무갈제국의 탄생과 전성기
‘무갈’이란 아랍어로 몽골이라는 뜻으로 이는 무갈제국이 티무르의 후손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정확히 말하면 투르크계 지배자였지만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 후손이 건립한 왕조에 무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또 무갈왕조는 1526년 중앙 아시아 출신 바부르(1526-30)에 의해 창건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3대왕인 아크바르(1565-1605) 재위 시절에 국가가 정비되고 제국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게 된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1530-39; 1555-56)은 아프가니스탄의 패쉬툰 왕조에 패해 영토를 거의 빼앗기다시피 했으나 이후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자신의 왕권도 되찾을 수 있었다. 아크바르와 함께 5대 샤자한(1628-58) 재위 시기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로 영토가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고 통치 인구도 1억 5천(당시 세계 인구의 1/4)에 달했다. 샤자한 시기에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타지마할’로서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쉬주(州) 아그라에 위치한 이 영묘(靈廟)는 지금도 세계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아크바르는 40년에 걸친 통치 기간 동안에 비무슬림 피지배층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술흐이쿨’(peace to all)이라는 일종의 수피철학에 근거한 정책을 채택하여 힌두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제수이트교 등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고 이와 관련하여 아크바르는 비무슬림들에게 부과하는 지즈야세금까지도 철폐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심지어 말년에 가서 이슬람과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까지 포괄하는 ‘딘이일라히’(religion of God)라는 이름의 포용적, 절충적 종교까지 창시했고 임종 직전에는 자신의 창시한 종교로 개종을 하려다가 궁중시종들의 만류로 결국 무슬림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샤자한의 아들인 6대 왕 오랑제브(1658-1707)는 이전 왕들의 종교적 관용정책을 과거로 되돌려 엄격한 수니 이슬람 원리에 근거한 정책을 강행했다. 그는 수많은 힌두사당을 파괴하고 음악연주까지 금지시켰는데 그래서 18세기 이후 무갈제국의 쇠퇴가 오랑제브의 종교정책과 이에 대한 힌두교도들의 저항 고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갈제국의 멸망과 그 유산
1707년 오랑제브 사망 이후 무갈제국은 후계자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는 혼돈 상태에 빠졌다. 무하마드샤(1719-1748)를 제외한 14명에 달하는 무갈왕들은 그 후 재위 기간을 10년도 못 채우고 폐위되거나 사망했다. 그래서 결국 18세기를 통틀어 무갈제국은 페르샤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인도 남부의 데칸평야까지도 힌두왕조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8세기 중반 이후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에 진출한 영국이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1857년 세포이 반란 이후 무갈왕조는 공식 폐지, 영국 정부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무갈제국이 멸망한 지 150년이 지났지만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과거 무갈제국 치하에서 단일 문명권이던 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 인도, 파키스탄(서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제각기 찢겨 나가고 그들 중 일부 나라들은 서로 적대시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국 식민당국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끊임없이 이간시켰고 1947년 인도 독립 당시에도 힌두교-이슬람 인구 밀집 지역을 기준으로 자의적인 국경선을 그음으로써 독립 직후 무지막지한 학살을 초래하여 양자 간에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게 했기 때문이다.
이밖에 아프가니스탄이 별도의 민족국가로 떨어져나간 근원은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은밀하게 벌어졌던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 두 열강의 합의 하에 아프가니스탄은 완충구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동부는 파키스탄 서부와 구분하기 힘들고, 패쉬툰족 주민들은 국경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양쪽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오가고 있다. 그리고 헤랏을 중심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서부 지역은  이란과 거의 같은 문화권에 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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